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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주 Apr 11. 2024

열 번째 봄

4.16 기억교실을 다녀오다

사전투표를 끝내고 선거일에 아이들과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내내 마음에 두었던 그 곳에 가고 싶어졌다.

안산은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지만 10년 전 봄, 사고 직후 합동 분향소에 갔던 이후로 딱히 갈 일도 없었고, 차마 가게 되지도 않던 곳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목포에 여행을 가도 막상 진도대교를 건너 팽목항이 있는 진도에 가는 것이 마음 어려워지는 이유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겨우 7살인 쌍둥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디에 가는지 짧은 설명을 해줘야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오래 전에 하늘나라에 간 언니 오빠들이 공부하던 곳이야

그 곳에 가서 언니 오빠들에게 인사하고 올거야

너희들도 언니 오빠들에게 그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하라고 인사하고 올 수 있지?

아이들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차로 30분, 4.16 민주시민교육원은 단원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건물 뒤로 큰 주차장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주차를 하고, '기억관'이라고 쓰여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방명록을 작성하고 3층으로 올라가 천천히 보며 내려왔다.


3층에 올라가니 안내 해주시는 선생님이 계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유가족들의 엄청난 노력으로, 10년 전 4월 당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과 교무실을 그대로 복원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고 하셨다.

교실은 2014년 4월에 멈춰있었다.

2학년1반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의 책상과 의자, 교탁이 놓여있고, 게시판과 벽면에는 당시 학급의 안내 사항,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 벽에 붙여놓은 달력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학생들이 만든 4월 달력에 '수학여행'이라고 표시해 놓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책상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아이들은 생존자, 그렇지 않은 희생된 아이들의 책상위에는 기억패와 꽃, 방명록 등 아이들을 위한 물건들이 올려져있었다.

안내 선생님은 2학년1반은 상대적으로 생존자가 많아 빈 책상이 많지만, 7반의 경우 생존자가 단 한명이라고 하셨다.



2학년1반은 솜씨 좋은 학생들이 많았는지 다른 학급과 다르게 손수 만든 달력이 벽에 붙어있었다. 


10년 당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의 배치와 책상,의자, 사물함, 칠판, 게시판은 물론,  당시의 천장, 교실 외벽의 나무 몰딩까지 그대로 떼어와 복원해 놓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이 자리에 있던 기존 건물을 허물고, 단원고등학교 교실 배치에 맞춰 니은 자로 건물을 새로 지은 거라고 한다.


칠판에는 사고 이후 방문객들의 메세지가 가득 쓰여 있었고, 칠판 옆 게시판에는 학사일정, 시간표 등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정말 다 있는데 아이들만 없었다.

슬픈 공허함이 느껴졌다.


정권이 바뀐 뒤로, 이 공간에서 공식적으로 묵념을 한다거나, 공간의 이름 앞에 '세월호'란 단어를 붙이는 것을 우회적으로 금지시켰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고 금지한다기보단, 불평민원을 접수하게 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추모를 방해한다는 것.

학교 교장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단체 방문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어, 뜻있는 선생님들이 동아리 학생들 몇몇만 데리고 학교 몰래, 학부모들 몰래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


학교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도 한 마디 덧붙였다.

봄이되면 외부 강사들에게도 지침이 내려온다고 한다.

4월에는'세월호'언급 금지, 5월에는 '5.18' 언급 금지. 

우리가 어떤 세월을 살고 있는 건지 새삼 실감이 나질 않았다.


2층에 내려가니 2학년 교무실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희생되신 선생님의 자리마다 사진과 꽃, 방명록이 놓여있었다.


우리 가족 외에 두세 명의 청년들이 홀로 방문해 이 곳 저 곳을 살펴보고, 책상마다 올려진 방명록을 읽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곳 저곳을 누비며 구경을 했지만, 아들 녀석은 괜시리 마음이 불편한지, 울먹거리며 어서 여기를 나가자고 보챘다.

딸아이는 어떤 언니의 책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인형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며, 

"엄마! 이 000언니도 이걸 좋아하나봐!!" 웃으며 말했고, 언니 오빠들의 사진과 꽃이 너무 이쁘다며 감탄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어요.."

나의 물기어린 고백에, 안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오셨다는게 더 중요해요. 사고 직후에는 누구든 관심을 갖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과 기억은 멀어지죠.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에 기억해주고 방문해주고 게다가 이렇게 아이들까지 함께 와서 무언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이 참 귀해요"


10년전 봄, 나는 분노했고, 슬펐고, 참 많이 울었다.

합동분향소에 가서 아이들 영정 사진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해마다 벚꽃이 아팠다.

수학여행 직전, 교정의 벚꽃나무 아래에서 선생님과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꽃이 지는 일은 더욱 슬펐다.

지금 지는 이 꽃은 내년에 다시 피겠지만, 아이들의 꽃은 영영 져버렸기 때문이다.


1층에 내려오니 희생된 아이들에게 음성 메세지를 남길 수 있는 작은 부스가 있어 아이들과 들어갔다.

옛날식 전화수화기를 들어 메세지를 녹음하면 기록물로 보존된다고 한다.

내가 먼저 짧게 얘기하고, 아이들에게 

언니 오빠 형아 누나 그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하세요 잊지 않을게요

라고 말하게 했다.


기억관을 나오며, 아이들과 사진 몇장을 찍고, 따듯한 햇빛 아래, 너무나도 조용한 이 곳이 못내 쓸쓸하게 느껴져 건물을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

기억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방 한칸을 내어주는 일이다.


세월호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해서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들에 상처받은 유가족들과 남겨진 사람들... 그들과 함께 희생자를 기억하고 때때로 안부를 물어주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의 아이들과 남겨진 이들을 보호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 것, 이것은 어떤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리해야 하는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18살 봄에 시간이 멈춘 아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루시드폴의 [아직,있다]를 듣는다.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아이들은 말한다.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우리보다 먼저 먼 길을 떠나가버린 아이들의 외침과 기다림이 아직 많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이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꿋꿋이 보여주고 싶다.

18살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첨부하는 링크는, 시사인에서 세월호 사고 10주기를 맞이하여, 세월호를 기억하는 100명의 기억을 모아, 

그 이야기를 펼쳐놓은 페이지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주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https://sewol100.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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