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지 않았다.
자유의 여신상, 뉴욕에 가면 꼭 봐야 하는 뉴욕의 상징이다.
뉴욕을 여행지로 선택했던 이유는 미국에 왔으면 뉴욕은 가봐야지!라는 나만의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욕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미국에 다녀왔다고 할만한 대표적인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 처음 계획했던 동부 여행은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세 지역을 2주 동안 여행하는 것이었다.
애틀랜타에서 뉴욕으로 가는 국내선이어서 그런지 존 애프 캐네디(JFK) 공항이 아닌 라과디아(Laguardia)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 공항이 하나만 있는 줄 알고 당연히 JFK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공항 코드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국내 항공사가 주로 들어가는 공항은 잘 알려진 JFK이고 라과디아 공항의 코드는 LGA이다.) 한국에서 애틀랜타 공항으로 출발할 때 성과 이름을 잘못 적었던 터라 항공권 수속을 할 때마다 긴장을 했다. 다른 비행기를 탄 줄 알았다. 마치 나 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버스를 타고 할렘(Harlem)에서 내려 타임스퀘어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민박에 도착했다. 막상 뉴욕의 중심에 왔는데 어디부터 가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남들은 여행 갈 때 엑셀에 시간 별로 일정을 짠다고 하는데 나는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하고 갔다. 숙소에 있는 뉴욕 여행 책자에 나와 있는 곳만 가도 뉴욕에서의 5일이 끝날 것 같았다.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에서의 뮤지컬, 자유의 여신상, 월스트리트... 보고 듣고 먹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첫 번째 일정을 타임스퀘어로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걸었다. 뚜벅뚜벅, 지도도 보지 않고 여기저기 걸었다. 이 곳이 바로 남들이 말하던 뉴욕이구나, 하면서 걸었다. 몇몇 사람들은 뉴욕이 강남 거리랑 비슷해서 감흥이 없다고 하는데 직접 가보니 왜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강남 수준의 빌딩들이 아니었다. 만인의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나오는 그곳,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이 야무지게 돌아다니던 진짜 뉴욕이었다.
다음 날,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이곳저곳 '관광 명소'를 걸어 다녔다. 버스도 용감하게 타보고 차이나 타운, 리틀 이탈리아, 그리고 월스트리트도 가봤다. 그렇게 주요 관광지를 간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과 뉴욕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감할 수 있다.
" 아! 나도 거기 가봤어!"
그런데 그저 '가봤다' 정도의 의미지 그곳을 방문한 경험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서 뭔가 추억을 쌓았더라면 달라졌겠지만 눈도장을 찍고 오는 것이 다였다.
오히려 관광지에 다녀온 시간보다 뉴욕의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쿠키 집에 간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인썸니아 쿠키(Insomnia cookies) 였는데 시험기간에 늘 먹는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대학생활을 비교하며 친구와 대화했던 시간이 더 의미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기로 마음먹은 날이 왔다.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페리(Ferry)를 타야 했다. 이미 관광지를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못 느낀 후라 길게 늘어 선 페리 티켓 구매 줄을 보는 순간 '굳이?'라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티켓을 사고 페리를 타고 움직이면 못해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데 저걸 가까이 가서 본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그래서 그냥 돌아 나왔다.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한들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 뉴욕 여행을 이야기할 때 자유의 여신상 봤어?라고 물어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행지의 관광 명소를 방문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내가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 여행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에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은 경험 중의 하나일 뿐이다. 깊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가 제일 좋았는데?
뉴욕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센트럴 파크에서 글을 쓰던 순간을 꼽는다. 진짜 뉴욕 치즈케이크를 처음 맛보던 순간도 어릴 적 꿈이었던 월스트리트를 방문한 시간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억나는 시간은 센트럴 파크에서 로컬들의 삶을 보면서 글을 썼던 시간이다. 딱히 글을 쓰려고 찾아갔던 건 아니었다. 센트럴파크도 사실은 방문해야 하는 관광지 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뉴욕에 갔으니 센트럴 파크는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공원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지금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마구 떠올랐다. 노트도 없고 글을 쓸 수 있는 도구가 하나도 없어서 포스트잇에 글을 썼다. 잔디밭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봤다. 어떤 외국인은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배경과 함께 사진으로 남겨도 되냐고 물어봤다. 글 쓰는 거에 그만큼 빠져있었나 보다.
그 당시에 적은 글을 옮겨 본다.
그냥 지금 Central Park에서 바람맞으며 돌에 앉아 글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좋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냥 이 순간이 좋다. 운동화, 반바지, 티셔츠. 이 여유가 좋아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행복하다. 여행 온 후 처음으로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이 정말로 행복하다. 인위적으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지금 진짜 행복하다. 노래를 듣지 않아도 소리가 만드는 평화로움이 있다. 지금 처음으로, 혼자 오는 여행의 재미를 알았다. 혼자 여행하는 게 좋은 경험인 것은 틀림이 없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저렇게나 많이 쓰다니. 글만 읽어도 얼마나 그 순간에 빠져있었는지 보인다.
내가 한국에서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그 나라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여행의 랜드마크를 방문하는 것보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시간이 더 좋았다. 그곳에 앉아서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사색하던 그 순간이 행복했다. 자유의 여신상이든 브루클린 브릿지든 무엇이 중요하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더 값진 시간이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뉴욕에서 이틀 더 머물기로 했다. 그 당시 나에게 필요한 건 관광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뉴욕 여행 이후로 관광지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제 여행을 가면 공원이나 로컬들이 자주 가는 카페에 간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마주하지 못했던 내면의 나를 본다. 글도 더 잘 써지고 여행을 다녀온 후의 만족감도 더 크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라면 관광은 꼭 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행에 정답은 없으니까. 내가 나의 삶을 더 다채롭게 하기 위한 목적의 여행이라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
서울에 왔는데 이순신 동상을 보지 않았다고 한들 뭐라 할 사람 누구인가.
관광지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