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나트랑
엄마랑 베트남 나트랑에 다녀왔다. 이직 전 일주일의 휴가가 생긴 덕이다. 급하게 결정된 이직과 휴가였기에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한 여행이다. 나트랑을 여행지로 정한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항공사 직원 티켓을 이용해서 좌석이 여유로운 노선을 찾았다.(비행기에 빈자리가 있어야 복지 티켓을 사용하는 항공사 직원이 탑승할 수 있다.) 목적지보다는 엄마와 여행을 간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단 둘이 떠난 첫 여행에서 엄마에 대해 그리고 나와 엄마의 관계에 대해 배웠다.
엄마는 함께 여행하기에 참 편한 사람이다.
원래도 무던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는데 여행을 함께 해보니 정말 편한 사람인 걸 깨달았다. 엄마는 예민하지도 않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 허기가 자주 지는 편도 아니라서 식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급하게 준비했던 탓인지 5 성이라고 해서 예약했던 호텔은 인터넷에 나와 있는 사진보다 시설이 좋지 못했고 조식도 기대 이하였다. 그런데 엄마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엄마와의 여행에서 정말 신기했던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잠을 잘 못 잔다. 특히나 여행지에서는 더더욱. 보통 여행을 가면 아무리 좋은 호텔에서 자도 세네 시간을 자는 게 전부다. 그런데 나트랑에서는 정말 푹 잤다. 아마 엄마가 옆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트랑에 도착한 첫날 분짜를 먹기 위해 분짜 맛집을 검색하니 '분짜 하노이'가 나왔다. 오바마 분짜로 유명하기도 하고 하노이 여행에서 가본 적이 있어서 아무 의심 없이 갔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의자도 불편하고 무엇보다도 위생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아주머니와 아들 둘이서 운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모든 것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조리해서 주었다. 하노이의 분짜 집도 깨끗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물론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너무 미안해하니까 엄마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그 청춘은 나의 그것과 같았다.
나는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편이다. 듣는 것이 더 편해서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에게 질문하고 듣는다. 반면에 엄마는 즐겁게 이야기를 한다. 여행하는 내내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에도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이틀 내리 함께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트랑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엄마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내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엄마 사진 잘 찍네' 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 사진 동아리를 했다고 한다. 연합 동아리였는데 사진 찍는 구도도 배우고 직접 암실에 들어가서 인화까지 했다고. 엄마의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거의 40년도 더 된 일인데 그때 카메라를 배운 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랑에 미치는 건 한 번이다. 두 번은 없다.
동아리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의 첫사랑에 대해 들었다. 엄마가 말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 사람으로 세계가 가득 차는 경험은 평생에 딱 한 번뿐이라고. 그 후의 사랑은 그 전의 것과 같을 수 없다고 했다. 스무 살 초반에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대던 내가 그 후의 사랑에 미지근함을 느끼는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엄마가 만든 나라는 사람이 지금 그 청춘을 살고 있다.
언니와 내가 다른 이유는 어린 시절에 있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성인의 성격적인 특성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한다. 나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는데 언니와 나의 생활리듬은 자매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 나는 아침에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데 반해 언니는 밤에 언제까지고 깨어있을 수 있는 올빼미 형이다. 여행에서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들은 건데 언니와 나를 키운 방식이 달랐다.
언니가 어린 시절, 엄마 아빠는 맞벌이를 했고 매일 밤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어린 언니는 그런 부모를 만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았다. 보통의 세네 살 아이라면 초저녁부터 자는 게 맞을터인데 우리 언니는 그 나이 때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엄마는 집에서 공부방을 했다. 그래서 언니와는 다르게 아주 이른 저녁부터 나를 재웠다고 한다. 엄마는 언니와 나의 키 차이도 여기서 기인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언니의 키는 163cm이고 나는 167cm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언니와 내가 왜 이렇게 다른지 궁금했는데 어린 시절의 삶이 달랐던 거다. 수수께끼가 풀렸다.
엄마와의 여행은 너무도 좋았다. 여행이 어떨 거라고 예측하지 않고 떠났는데, 정말 좋았다. 엄마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좋았고 엄마와 나의 관계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함께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서로의 삶이 바빠서 집 외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하자고 약속했다. 가장 첫 번째로 언니가 집에 오는 날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