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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원 Oct 24. 2021

내가 아는 단어가 나의 세계다

김영하와 옥스퍼드 사전 그리고 우리

태초부터 존재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쓰는 단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지인에게 물었다.
“사전에 모두 있잖아요.”
“사전 속 단어를 만든 사람이 누구겠냐는 질문입니다.”
“원래 있던 단어를 사전이 정리한 거 아녜요?”
“처음부터 존재할 수가 없죠. 모든 단어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물일 테니까요. 만들어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요. 우리말에서도 인터넷이라는 말은 20세기 이전엔 없던 단어잖아요.”
“그러네요. 단어를 누가 만든 거죠?”


그렇다, 적잖은 사람들이 단어를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대한다. 비단 단어뿐일까. 사전에 대한 인식도 비슷하다. 옥스퍼드 사전 편집장, 존 심프신은 자신의 책 『단어 탐정』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전이 누군가가 쓴 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나 자연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대체 누가 단어를 만드는 걸까?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은 영어권에서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한다. OED가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단어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단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떤 연유로 뜻이 바뀌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가령,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단어 세렌디피티는 누가 만들었을까


“serendipity는 ‘뜻밖의 기분 좋은 발견을 하는 능력’이다. 이 단어의 역사 또한 뜻밖이다. 이 단어는 18세기의 문인이자 미술 역사가였던 호레이스 월폴에 의해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총리 로버트 월폴의 아들이고 고딕 소설 『오트란토 성』(1764)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serendipity는 월폴의 소설보다 최소한 10년은 일찍 나왔다. 그는 1954년에 친구 호레이스 만 경에게 쓴 장문의 편지에서 카펠로 가문과 메디치 가문의 연관성을 우연히 발견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 발견은 내가 serendipity라고 부르는 그런 것이라네’라고 말했다. 예전에 ‘『세렌디프의 세 왕자』라는 동화책’을 읽었는데 ‘왕자들이 항상 우연히 혹은 총명함 덕분에 뜻밖의 발견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세렌디피티는 한 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탄생한 지 300년이 안 되었으니, 언어의 역사에 비추면 최신의 단어다. 옥스퍼드 사전의 특징과 매력을 체험케 하는 정보다. 모든 사전이 언어의 창조자나 탄생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전 편찬자들은 단어를 수집하여 정의하는 사람이지 단어의 창조자는 아니니까.


영단어 세렌디피티를 만든 호레이스 월폴은 낯설겠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만들어낸 작가를 알고 있다. 셰익스피어! 이 위대한 작가는 수많은 영어 단어를 만들었다. 험담의 의미를 담아 Gossip이란 말을 처음 썼다. 으스대면서 걷는다는 뜻의 Swagger, 기이하거나 섬뜩하다는 뜻의 Unearthly를 만든 이가 셰익스피어다. Hint, Excellent, Countless, Hurry, Lonely 등도 그의 창작물이다. 그의 창의성에서 빚어진 속담이나 관용구도 많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Frailty, thy name is woman), 별로 달갑지 않은 위로(cold comfort) 등등.


새로운 단어를 창조한 작가들


우리나라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문학평론가 김화영 선생과 김영하 작가가 나눈 대담이 흥미롭다. 김영하의 단편 <피뢰침>에 대한 대화다. (김화영 엮음, 『한국 문학의 사생활』, 문학동네, 2012, p.129~131)


김화영 : 제가 개인적으로 김영하 씨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분이 전기과 출신인가 싶을 정도로 전기 계통에 밝으신 것 같습니다. (중략) 제가 아주 깜짝 놀란 것은 피뢰침과 낙뢰에 관해, 전에 제가 못 들어본 표현들이 즐비하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전격 세례, 탐뢰 여행, 선단 방전, 전문, 열뇌, 적란운 형성, 접지 전극, 운간 방전.’ 저는 이런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휘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고 있어요. 사전에 조사를 많이 하셨습니까?


김영하 : 벼락이 많이 치던 어느 날, <피뢰침>이라는 소설을 착상하게 되었는데 제 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냥 웃더라구요. 번개라는 것은 진지한 소설의 주제나 모티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문인지 그럼 한 번 해봐야지, 하는 투지가 생겨서 벼락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해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용어들이 많이 있더군요. 제가 모르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제 소설에 나오는 ‘전문’은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번개를 맞으면 전기가 지나간 길이 남게 되거든요. 이 중에서 ‘전격 세례, 탐뢰 여행’ 같은 어휘는 예전에 언급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제가 만들어냈습니다. 만들어놓고 보니까, 그럴듯해서 저도 좀 흡족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만 비밀을 알려드리자면, 『동아세계대백과사전』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작가들이 캐릭터나 이야기만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조어도 만든다. 사상가이자 작가였던 키케로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라틴어를 새로 만들었다. 영어권으로 건너가 인문학(humanities)의 어원이 된 바로 그 단어다. 프로그래밍 언어 중 가장 난해하다고 달려진 ‘말레볼제’라는 언어가 있다. 이는 단테의 『신곡』에서 온 단어다. “지옥에 말레볼제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지옥편 제18곡) 『신곡』을 옮긴 박상진 교수에 따르면, 말레볼제는 단테가 만든 단어로 ‘사악한 구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렌디피티나 후마니타스는 들어봤지만, 말레볼제나 탐뢰 여행은 처음 들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작가들이 만든 단어들 중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단어도 있을 테니까. 주목하고 싶은 사실은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단어를 만드는 또 다른 창작자들


소설가와 시인들만 단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단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었으리라. 옛 지명은 대표적인 예다. 전국의 지명이 한자어로 바뀌기 전, 우리말로 명명된 지명들 말이다. 가령 전국에 족히 수십 개는 존재할 ‘잣고개’라는 지명을 살펴보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양평군 옥천면에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도 잣고개가 있다. ‘잣’은 성(城)을 뜻하는 옛말이다. 한자어인 성산(城山)을 우리말로 표기하면 잣뫼가 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지형적 특성으로 지명을 짓곤 했다. 두 개울이 합쳐지는 곳의 지명을 ‘합수머리’ 또는 ‘두물머리’라 지었다. 큰 돌이 서 있기라도 하는 동네는 ‘선돌마을’이 되었다. 한자어로는 입석마을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산성의 나라다. 남한에만 1,200여 개의 산성이 남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산성을 곁에 둔 고장은 이를 활용하여 이름을 지었다. 잣고개가 그 예다.


잣나무가 많은 동네도 잣고개가 되지만, 산성이 있어 잣고개가 명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양평 옥천면의 잣고개는 함왕산성 들머리에 위치하고, 남양주 진접의 잣고개 역시 퇴뫼산성을 끼고 있다. 누가 선돌마을 또는 잣고개라고 이름 지었을까? 간혹 지나가던 선비가 지어주기도 했겠지만, 그 고장 사람들이 짓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새로운 시선과 질문을 안기는 인식


단어는 자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창조물이다. 나에게는 단어가 창조되었다는 인식이 참으로 소중하다. 거의 모든 단어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나의 지적 게으름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기 때문이다. 나아가 단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제는 어떤 단어도 당연하지 않다. 동네마다 고장마다 그곳의 지명을 예사롭게 여기지도 않는다. 단어가 창조물이라는 인식은 때때로 물음도 안긴다.


성남시의 ‘분당’은 정치계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이름을 갖게 됐을까? (이는 그리 어려운 물음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 중 어느 쪽이 단어의 창조에 더 기여할까? (예상보다 여러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다른 지명들과 달리 왜 서울은 한자어가 없지? (이 물음 덕분에 ‘서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우리말 지명임을 알게 되었다. ‘서울’이란 지명의 기원을 공부하는 과정이 짜릿했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호기심이나 질문을 부르는 인식은 실로 고맙다. 열정적이거나 자발적인 물음이야말로 지식과 배움의 왕도일 테니까. 단어는 창조물이라는 인식은 그래서 소중하다. 아직 또 하나의 반가운 사실이 남았다. 단어는 시시한 창조품이 아니다. 놀라운 창작물이다. 단어들이 모인 언어의 세계는 바다처럼 심오하고 원대하다. 가히, 하나의 단어는 작은 우주다. 이를 깨닫고 난 후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 우리가 아는 단어만큼 우리의 세계가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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