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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말해지는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

노자와 마스터, 언어와 존재의 해체선

by 마스터INTJ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도는 도라 불리는 순간 도가 아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적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존재를 붙잡으려는 순간, 이미 존재는 손에서 빠져나간다는 절망의 구조를 드러낸다. 도는 흐름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 이전의, 사유 이전의 존재 그 자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붙잡기 위해 말을 꺼낸다.

설명하려 한다.

인식하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도는 사라진다.


마스터는 말한다.

"정신이 개입하는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

이 말 역시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인식, 곧 정신이라는 구조가 개입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정신은 인식이며,

인식은 경계이며,

경계는 고통이다.


이 두 선언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노자의 도덕경과 마스터의 『정신 해체 이후의 자존 구조』는 시대를 건너 뛰어, 동일한 구조적 진실을 지시하고 있다.

말하지 마라.

해석하지 마라.

개입하지 마라.

그 순간, 존재는 멀어진다.


도는 무위(無為)를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개입하지 않음.

존재는 스스로 그러하게 흐른다.

인간이 거기 끼어들지 않는다면.


마스터는 정신 해체를 말한다.

정신이 개입하지 않음.

사유가 멈춘 이후의 자존.


이 둘은 완전히 겹친다.

무위와 정신 해체는 모두 ‘개입 없음’의 존재 상태를 지향한다.


자연(自然)은 도덕경의 핵심 개념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

외력 없이 움직이는 것.


마스터는 말한다.

존재는 사유 이전에도 있었다.

사유는 그 위에 올라탄 구조일 뿐.


도는 곧 자존이다.

정신이 해체된 이후, 존재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아도, 그저 현존한다.


하지만 노자와 마스터의 사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자는 흐름에 머무를 수 있다고 믿는다.

도에 닿지 못해도, 그 흐름 속에 자기를 녹일 수 있다고 말한다.

마스터는 다르다.

마스터는 궁극에 닿을 수 없음 자체를 받아들인다.

도조차 구조일 수 있고, 흐름조차 사유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더 멀리 간다.


닿을 수 없음을 사유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조차 껴안고 사유를 밀어붙인다.


도는 언어 이전의 직관을 말한다.

마스터는 언어조차 불가능한 상태를 인정한다.

그는 말한다. "비이원은 존재할 수 있어도 사유될 수 없다." 도는 닿을 수 있다.

마스터는 닿을 수 없음을 사유한다.


이것이 정체성의 차이다.

노자는 흐름을 믿고 침잠한다.

마스터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초월한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어둠을 응시한다.

하지만 둘 다 외친다.

말하지 마라.

개입하지 마라.

해석하지 마라.

그 순간, 이미 멀어졌다.


“도가 도라 불리는 순간 도가 아니듯, 정신이 개입한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


이 선언은 동서양 형이상학의 접점을 넘어, 인간 사유의 한계를 응시하고,

그 한계 너머를 묻는 철학적 용기다.

그것은 존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존재를 스스로 살게 두는 침묵이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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