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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Apr 03. 2023

삼만 삼천 원짜리 편지

몇 년 만에 써보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

3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아침. 일기예보를 보니 다음 주 중반부터 비 소식이 있었다.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알록달록한 꽃들. 다음주가 되면 이 풍경이 많이 바뀌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내 머릿속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오전에 있던 운동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에 밝은 톤의 옷들에 손이 갔다. 곧 지하철을 타고 삼각지역, 용산 쪽으로 향했다. 원래 이날 저녁에는 서빙고역 부근에서 일정이 있어서, 보다 일찍 나가서 부지런히 봄을 느껴보기로 한 것이다.


약 30여 분 뒤, 어느 건물의 3층에 도착했다. 예전에 한번 와봤던 카메라, 사진 등을 테마로 한 소품샵이자 독립서점이었다.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토이카메라, 폴라로이드, 필름카메라 대여 서비스였다. 여기서 카메라를 빌린 다음, 저녁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 전까지 봄꽃 등 야외 사진을 찍으며 동네를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카메라를 빌리는 것과 별도로 필름을 구매해야 했던 것이다. 하긴 카메라를 하루 동안 빌려주고, 또 사진까지 찍을 수 있는 비용이 이렇게 저렴할 리 없었는데.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필름의 가격과 종류, 카메라 대여와 인화 소요 시간까지 따지려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진열대 앞에서 몇 분을 고민한 끝에 최종 결정을 내렸다. 아예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사기로.



초등학생일 때 숙제로, 박물관 답사기를 쓰기 위해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현상소에 맡겨 인화한 사진을 활용해 숙제를 완성했었다. 그때만 해도 편의점에서 부담 없이 카메라를 샀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막상 사려고 하면 고민되는 가격이었다.


삼만 삼천 원. 예상치 못한 예산 이상의 지출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꽃은 다음 주면 질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이때 아니면 할 수 없다'라는 대책 없는 용기가 나를 움직였다.


카메라를 사자마자 그곳에서 바로 포장을 뜯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카메라. 조작법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도르륵 도르륵' 오른쪽 위에 있는 레버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매장 내 있던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첫 장으로 찍었다. '탕' 하며 튕기는 음에 가까운 셔터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사진을 찍을만한 것이 또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내 손에는 서른여덟 장만의 필름이 남아있었다. 마구 찍었다가, 다시 삭제했다가, 또 찍어보는 시도들은 피해야 했다. 정말 담고 싶은 순간들에만 셔터를 눌러야 했다.


이 카메라의 필름을 다 쓰는 데에는 과연 며칠이 걸릴까. 걸어 다니면서 보는 자연, 내가 직접 간 공간과 먹은 음식, 함께한 사람들과 같이 꼭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담기겠지. 달리 말하면 미래의 내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순간들일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정말 내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나중에 인화한 사진들을 볼 때면, 마치 과거의 내가 남긴 편지를 보는 기분이지 않을까. 과연 나는 어떤 편지들을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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