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표류기

폭설

by 니체

폭설 / 이철수

밖에 내어놓은 헐한 이삿짐같이 여미지 못한 시린 마음을 부려놓고 오갈 데 없는 당신과 내가 그날 북받쳐오는 어둠에 갇혀 길게 울음 운 적이 있었지요

굵은 눈발은 온세상을 덮고 끝내는 당신과 나를 어디론가 끌고가서 죽여버릴 것만 같은 극치의 밤이 무서웠습니다 침묵을 강요하는 그 평온한 두려움과 남루한 빛의 부재를 깨치도록 밤새 눈은 내리고 당신과 나는 그 무심한 적설을 견디지 못해 고요히 얼어있는 짜디짠 슬픔과 마주하였습니다

눈은 내려 쌓이고 모든 길은 사라져 향방 없는 사랑은 주인을 잃었으니, 이렇게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며 나머지 생은 버리고 가자, 버리고 가자고 서로의 목을 감고 칼을 벼리던 도수쟁이같이 시퍼런 비탄에 갇혀 몸을 떨던 밤이었지요

그러나, 그 독한 마음을 곰곰히 고쳐먹고 당신과 내가 세상에 와서 더 잃을 것이 무에냐는 생각에 이르자 무기력한 정신이 눈을 떴습니다 절망은 잠시 쉬어가는 삶의 경로일 뿐 우리가 탐험해야할 거대한 수평선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듯 막다른 길에서는 바람도 제 몸을 바꾸어 담을 넘지 않던가요 그래 꽁꽁 언 마음의 바깥에다 구멍을 내고 당신과 나는 이냥 마지막 남은 가쁜 숨을 다시 달게 불어보자 다짐했던 뜨거운 밤이었습니다


ㅡ반달 표류기

<2023 현대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