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표류기

심상心像

by 니체

ㅡ볕과 그늘과 골방 이야기


아직 노을이 오기 전에 모정에 가서 꼭 잠긴 마음의 빗장을 끌러 볕집을 샀습니다

돌샘 곁 시절이 한창인 살구나무 그늘과 이 집의 가솔이었을 골방 처마 밑 허옇게 머리가 센 늙은 그늘도 몇 필 끊었습니다

꽃을 피우는 일이 생업이어서 늦도록 이국의 소식을 기다리다 목이 잠긴 해바라기 곁에서 온몸에 열꽃이 핀 갱년의 사루비아가 겉옷을 벗고 앉은 볕바른 귀퉁이에 금계국, 맨드라미, 접시꽃이 도란도란 한 지붕을 이운 담장아래 작은 별채를 마저 들이자 풀어놓은 새소리가 요리조리 자자합니다

쨍쨍한 한낮이 잘 여문 햇살 한가득 지게짐을 지고 맨발로 흙마당을 건너옵니다


뒤란 파밭에 오래 묵힌 짜투리 묵정 그늘이 게으르게 눈을 뜹니다

딱 고만큼 한 마음의 노잣돈을 헐어 거름으로 썼습니다

나는 이제야 볕과 그늘을 일구는 일이 기름지고 하루 중 가장 보람되는 것이 농사인 것을 알았습니다

잔뜩 구름이 끼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망중한으로 화투패를 떼듯 골방에서 종일을 두문불출 하다가도 어느 날 뒤란 쪽 눈길을 주는 햇살의 작란作亂에 마음을 뺏긴 그늘이 제 서늘한 목덜미를 조금씩 내어주었습니다 긴 팔을 뻗어 고물고물한 시간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살가운 오누이처럼 손을 잡고 어느새 반 마장쯤은 멀리 가서 까무룩해질 때에야 비로소 내 몸이 주인도 객도 아닌 무형의 온기가 무시로 드나는 무명소인 것을 알았습니다


ㅡ반달 표류기

<2023 현대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