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상철 Mar 16. 2019

정말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을까

콘텐츠 위에 서있는 21세기 사람들

바야흐로 ‘라이브(live)’시대다. 과거는 단편적인 시간의 흐름이었다. 라이브는 모두가 참여하는 장이다. 복합적인 계기의 장이다. 새로운 시대의 체험이고 초유의 일이다. 모든 것은 지금이다. 지금이 기준이다. 우리의 노래, 얘기, 아픔, 기쁨, 무용담 모두가 ‘지금’ 공유되고 있다. 진실이 있다면 그 기준은 바로 지금이 될 것이다.


최근 콘텐츠의 열풍은 라이브 시대의 전형을 말해준다. 피드는 라이브의 배열이고, 이 배열을 매개로 한 참여의 장이며, 매시기 지금이 소중한 현실임을 일깨워준다. 모든 에너지는 라이브로 사라지고 다시보기로 재현된다. 존재와 운동의 원천인 에너지는 총량이 일정하지만 한 곳으로 흘러 폐기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그 폐기된 에너지의 일부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지문의 미세한 터치만으로도 인연이 차고 넘친다. 피드는 인연의 영겁을 향한 최고의 속삭임과 사교술임에 틀림없다. 피드는 가장 빠른 관계 맺기이자 지성적인 교류다. 인간은 비로소 문자와 이미지만으로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한 만남에 이르렀다. 어느 시대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면이기에, 시공을 초월한 인류애의 여정이 시작된 셈이다.


피드는 이제 목격하는 것이다. 진실이 매실시간 공유의 장 위에 펼쳐지고 있음이다. 피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관계의 파생이 가져다주는 다양성과 놀라움이다. 피드는 의식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 의식은 함께 매번 소진돼 증발되고 만다. 누구나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길 바라며 그 순간 의식은 이탈되고 만다.


피드는 압축과 팽창의 기술이다. 피드는 앞뒤의 얘기를 압축된 형태로 펼쳐놓는 것이고, 팽창돼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피드는 낯선 인류와의 무차별 만남이자 반응이다. 거세된 스킨십 대신 의식의 공감이 뒷받침된 참여욕구의 발로다. 피드는 비로소 문자가 인격화한 인류문명의 최후의 은유이자 상징의 통로다. 피드는 평등과 참여의 함수를 완성시켜나간다.


피드는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이다. 참여만이 고유한 것이다. 사람들끼리의 연결만이 있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제 헤아릴 수 없는 피드의 무용담과 얘기들 속에 전해진다는 것이다. 성경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는 더 많다. 우리들의 얘기들이 진실이고 현실인 셈이다.


피드에 대한 놀라움은 근대 인간이 마주한 신의 영역과 비슷하다. 피드 라인은 21세기 성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의 장이자, 사연들이고 얘기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업데이트와 참여자가 수도 없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진리로 향하는 진짜 성경이 생긴 셈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이제 없다. ‘분주한 밤 평범한 밤’이 대체될 뿐이다. 전 지구적 일상의 교류와 얘기들은 밤낮 없는 피드 라인 위에 놓였다 사라지길 수도 없이 반복한다. 신기하지만 어디에도 거룩함은 없다. 피드는 서신 우편의 역사도 뒤바꿔놓고 있다. 안부와 사연들의 배열과 이탈은 피드라는 21세기 우편이 대신한다.


영웅의 시대도 마감하고 있다. 21세기 우리 모두가 영웅이고 주연이다. 피드의 탄생은 우리 모두가 참여의 주인이고 메신저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영웅의 무용담이란 실시간 엮이는 지금 우리들의 얘기들이다. 피드는 휴대폰이 만든 소통방식의 일대 혁명이다. 매 실시간 표현 욕구는 이동의 흐름에서 포착된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이고, 선별된 기억이다. 이는 서사로 편집되고 소통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의식이 갖는 기록들을 저장하는 서버는 이 세상에 없다. 삶의 순간, 매 찰나는 힘의 원리가 적용되는 행위의 계기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정의할 수는 없어도, 뭔가 관계의 엮임 속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문제는 참여하는 것이고, 참여의 장에 엮여나간다는 것이다. 피드는 하나의 방식의 문제이지만 그 원리가 매시기 참여 콘텐츠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인간은 증발되는 의식과 행위, 기억에서 제외되는 양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갖는 매시기별 의식과 존재의 기억을 저장하기 위한 노력이 그것이다. 문자 이미지, 동영상 등 각종 기술의 진보와 소통관계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피드는 무소유의 소유다. 피드는 싸이홈피가 가출한 것이고 페이스북이 다이어트 한 것이다. 자동차, 가구, 집기 등을 다 팽개치고 달랑 휴대폰만 갖고 나간 것이다. 현관을 드나들 필요도 없고 누군가로부터 구속받을 이유도 없다. 다만 가출한 외로움은 서로에게 의존과 협력관계를 만든다. 요요현상도 따로 없다.


피드는 커피로 치면 에스프레소다. 반면 페북은 라떼, 블로그는 카푸치노다. 피드는 가장 진한 압축 엑기스 원액 맛, 페북은 친근하고 달콤한 맛, 블로그는 수사가 화려한 거품 맛이 특징이다. 압축된 정제 원액인 피드는 좋아요에 의해 먹기 좋은 아메리카노가 된다.  


피드는 연금술사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같지만, 관계의 금맥을 찾아다닌다는 점에선 똑같다. 주옥같은 피드를 만들고 또 상대에게 아름다움과 공감을 전하기 위해, 우리들은 지금도 미지의 인맥을 찾아 나선 연금술사임에 틀림없다.


피드는 밀레니엄 명함이고 족보다. 그렇게 많은 명함도, 가가호호 대대로 내려오는 어떠한 족보도 피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성도, 직업도, 혈통도, 가문도 필요 없다. 이제 좋아요가 가훈이고, 댓글이 명함이고, 팔로어가 족보다. 인간은 죽어서 이름이 아닌 피드를 남긴다.  


피드는 불가사의다. 팔로잉과 팔로어의 주종관계는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처럼 비밀 그 자체다. 좋아요와 댓글이 수도 없이 많은 것도 의문이다. 24시간 그렇게 많은 사람들 하며, 끝없는 관계의 조합도 미지수다.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흥분의 연속이다.  


피드는 전동차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지 않고 어디론가 이동하듯, 수많은 피드와 좋아요가 줄을 이어 움직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전동차다. 피드 라인은 역과 출구이고, 좋아요는 군중이며, 댓글은 티머니의 신호다.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드라마다. 피드는 대사이고, 좋아요는 시청률이며, 팔로어는 시청자다. 우리는 모두가 피드 라인이라는 무대의 배우로서 주연이고, 조연이다. 대본은 없지만 관계를 맺어가는 각본으로는 역사상 최고다. 작가는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정말 최고다.  


피드는 소라껍데기다. 겉으론 무생물 껍데기이지만 귀 기울이면 심연의 바다를 품은 소리를 듣는 것처럼, 피드도 겉으론 대형 넋두리 장 같지만 귀 기울이면 경험의 면면을 품고 관계를 잇는 역사의 현장이다. 무생물이 생물의 역사를 체현하고 있음이 놀랍다.  


피드는 손톱이다. 표피로부터 자라나 자신의 성질을 벗고 각질화한 것이 손톱이듯, 수많은 관계의 날것 속에서 자라나 자아를 독립시키는 것이 피드다. 자라나다 추할 땐 잘라 정리하듯, 피드도 수없는 교정으로 정립돼간다. 어떤 역사를 차곡차곡 쌓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철학이다. 사실 피드는 얼핏 타인과의 대화인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끊임없는 자신과의 질문이자 소통이다. 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관심, 사랑,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결국 출발점은 항상 자신에게 피드백되고 만다. 우리는 어느새 철학자가 돼있다.


피드는 과학이다. 피드 라인에 그렇게 많은 수다를 떨고, 일상까지 소상히 늘어놓는 행위가 우연하고 질서 없는 일로 보이지만, 사실은 팔로잉과 팔로워가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어떤 법칙과 체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린 어느새 과학자가 돼있다.


피드는 백신이다. 분화된 밀레니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외롭고 고독하다. 이에 한줄기 빛을 던져준 것이 피드다. 우리는 언제든지 표현할 수 있고, 환대받을 수 있으며, 좋아요를 통해 공감할 수 있다. 정말 지금 시대에 딱 맞는 백신이 아닐 수 없다.


피드는 아스피린이다. 점점 고립화되고 소외돼가는 현대인들은 관계에 대한 열병을 앓는다. 그나마 피드가 그 욕구를 채워 열을 내리게 한다. 혈관 속의 핏덩이인 혈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기능은, 마르지 않는 좋아요가 잘 흐르는 피드 라인의 피드와 꼭 닮아있다.


피드는 링거액이다. 메마른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울증에 노출된, 세로토닌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야행성 문화는 멜라토닌의 분비에 영향을 주지만, 우리는 밤새도록 피드를 올리기도 한다. 피드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결핍을 채워주는 영양제임이 분명하다.


피드는 포스트잇지다. 지금 우리에겐 기억하고 챙길 일이 너무 많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색깔별, 크기별로 그 흔적을 수없이 뗐다 붙였다 하는 것처럼, 다양한 색깔의 느낌을 주는 피드도 피드 라인에 수없이 뗐다 붙였다 한다. 공감 탈부착용으로 피드만 한 것도 없다.  


피드는 계산기다. 팔로잉과 팔로어에 대한 숫자 계산은 기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드디어 삶을 계산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단초를 준 것이 피드다.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은 관계가 갖는 의미의 숫자다. 우리는 이제 관계까지도 계산에 넣고 있음이다.




피드는 백화점이다. 상술은 없지만 우리는 상행위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한 번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는 갖은 애를 쓴다. 그러고도 가끔은 남들이 봐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다. 피드라는 상품, 진열될수록 성가시기도 하다.


피드는 어머니다. 우리는 피드를 올리면서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는 언제든지 곧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피드들은 결국 한 번 더 좋아요를, 한 번 더 댓글을 바란다.  


피드는 거울이다. 우리가 그렇게 자신만의 것이라 우기며 수도 없이 피드를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쪽지를 보낸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결국 거울을 보듯 모두가 똑같은 행위의 반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뭔가 닮아가려는 본성이 있다.  


피드는 누구나 처음 겪어보는, 가장 많은 사람들과의 로맨스다. 한 인간이 평생 동안 맺는 친밀한 관계의 수는 50~150명 정도다. 피드가 관계를 확정 짓는 보증수표는 아니지만,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한계는 없다. 이제 인간은 완벽한 족보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피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참으로 여성적인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수다를 떨고 있는, 이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새 시시콜콜 '왈가닥'이 돼있는 것이다. 비로소 남성과 여성이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피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참으로 에로틱한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차별적 이성의 멘트와 이미지에 혹하고, 이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새 '내밀함'에 젖어들고 있다. 비로소 보편적 친밀감이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피드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존재를 극복하려는 현빈의 이야기처럼, 수많은 관계가 드라마로 엮이기 시작한 것이 피드다. 비로소 관계의 한계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무제한의 대화와 교류의 판타지 세계로 이미 들어가 있는 셈이다.


피드는 수다와 인문학과 인터넷이 결합한 인류 초유의 관계 과학이자 담론이다. 비로소 인간은 일거수일투족 개인 일상의 모습을 기억의 쓰레기장에서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공리가 입증된 셈이다.


피드는 고해성사다. 우리는 신기하게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여과 없이 고해바치는데 주저함이 없다. 과오도, 뉘우침도, 자랑까지도 털어놓고 만다. 숭배와 의식에 대한 비밀이 없다는 점이 종교적 행위와 다를 뿐이다. 우리 모두가 신부이고 목자인 셈이다.  


피드는 골프다. 광활한 잔디 위로 수많은 샷과 퍼팅을 날리지만 결국 구멍 하나가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많은 피드를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지만 결국 목표로 하는 것은 관계 그 자체다. 골프는 스윙이 기본이고, 피드는 팔로윙이 기본이다. 단 한 번에 적중할 때를 원하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케이블방송이다. 공중파 정규방송의 격조와 권력의 유인을 넘어, 공과 사를 망라한 다종 다양한 채널을 갖기 때문. 이보다 더 많을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가 채널이고 피드 각각이 프로그램이다. 실시간 방송은 24시간이 모자란다. 광고와 선전도 없다. 지독한 방송이다.


피드는 당구다. 치면 칠수록 묘미가 생기듯, 피드도 올리면 올릴수록 구미가 당긴다. 공이 잘 가다가 순간 비껴가듯, 팔로잉도 잘되다가 비껴갈 때가 있다. 팔로잉 땐 '피드-좋아요-댓글' 3쿠션을 잘 활용하고, 안될 땐 빈쿠션(쪽지)을 먼저 쳐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피드는 슬리퍼다. 어떤 예의나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고 가장 편한 차림의 탈부착이 장점이듯, 피드도 어떤 양식이나 격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좋아요, 댓글 등으로 표현한다. 부담 없이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하지만 없으면 불편한 것은 똑같다.


피드는 화장이다. 매일 거울 앞에서 또 다른 자신의 캐릭터를 몇 번이고 고치기를 거듭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듯, 피드도 삶의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사진을 고쳐가며 관계에 대한 재해석을 내리기를 거듭한다. 우리는 새로운 화장법을 익히고 있고 남성도 예외는 아니다.


피드는 감기다. 우리는 한 번씩 감기로 호된 병치레를 한다. 늘 치르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일상에 곤란을 겪는 것처럼, 팔로잉대로 되지 않는 팔로어에 대해서도 우린 간혹 호된 마음고생을 한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DNA다. 이중나선구조 배열 안에 생명의 형질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보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관계의 형질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보가 끊임없이 새겨지고 있는 것이 피드다. 생명현상을 기본으로 인간 개체는 비로소 관계구조를 완성시키고 있다.




피드는 빚이다. 좋아요와 댓글 구조는 채권과 채무관계이다. 좋아요를 함으로써 다시 좋아요로 돌려받는다. '기브 앤 테이크' 정신이 기본이지만 그렇게 안 될 때도 있다. 대개 팔로어보다 팔로잉을 더 깔아놓기 마련이고, 이는 다 빚이다. 우린 이제 진지한 빚잔치를 벌이고 있다.


피드는 라인이다. 라인이란 어떤 과정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을 뜻한다. 인간은 비로소 최초로 무한대의 관계 맺기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정립된 자아로 나아가는 거대한 여정의 목표점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그 길 위에 피드가 서있다. 정말 놀랍고 벅차다.  


피드는 우산이다. 맑고 쨍쨍한 날에는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궂거나 비가 오면 긴요한 물건인 것처럼, 평소에는 별 생각이 없다가도 외로움이 밀려올 때 절실해지는 것은 피드다. 우산이 일인용인데 반해, 인원에 제한이 없는 것은 피드만의 장점이다.


피드는 짐이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우리는 평생, 관계라는 짐을 이고 산다. 결국 좋아요는 관계에 대한 어떤 책임 선언인 셈이다. 무인도에 가서 수억 개 좋아요를 날린 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인간은 비로소 행복한 짐을 부려놓을 곳을 찾고 있다.


피드는 통장이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처럼, 매일 꼬박꼬박 생산하는 좋아요와 댓글은 피드 라인을 통해 교류되는 일종의 화폐다. 우리는 그 통장을 통해 팔로잉이라는 출금과 팔로어라는 입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남의 통장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피드는 가계부다. 주부들이 매일 소비품목을 낱낱이 적고 확인하는 것처럼, 피드도 매일 소비된 좋아요을 낱낱이 기록하고 확인한다. 매번 품목과 소비량이 일정한 것이 가계부라면, 피드는 일정할 때도 있지만 파격적일 때가 더 많다. 사실 피드는 가계부를 넘어서는 관계부다.


피드는 쇼핑이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듯, 필요한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린 피드를 올린다. 때로는 아이쇼핑을 하듯, 피드 없이 눈팅을 즐기기도 한다. 수많은 인파 속에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렬이 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드홀릭에 빠져있다.


피드는 쇼핑카트다. 물건을 실어 나르기 의한 카트가 쇼핑의 기본이듯, 좋아요를 운반하는 댓글은 피드의 기본이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기다리며 줄지어 있는 카트처럼, 한 번 더 봐주길 바라며 줄줄이 엮여있는 신세는 피드도 마찬가지다. 발 없는 피드가 굴러다닌다.


피드는 이어폰이다. 귀를 막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입을 닫고 무한한 좋아요와 관계의 바다로 항해하는 것은 피드다. 누군가를 의식하기보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다만 피드의 대상은 音原이 아닌 人原이라는 점이 다르다.  


피드는 케이블이다. 컴퓨터와 각종 전기장비가 들어서면서 온갖 케이블이 얽혀있듯, 시회가 분화되면서 수많은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목격하는 것이 피드다. 전기적, 물리적 흐름이 심리적, 화학적 반응으로 전화되고 있음이다. 정말 짜릿한 느낌이다.  


피드는 화분이다. 아파트 문화가 되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일상 중 하나가 베란다의 화분이듯, 현대문명이 들어서면서 타인과 소통하는 일상 중 하나가 휴대폰의 피드다. 땅이 아닌 화분에 영양분이 집약돼있듯, 사람이 아닌 피드에 인간성이 집약돼있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하이패스다. 교통체증과 정체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나온 방식이 하이패스이듯, 메시지 전달과 연락에 있어 효율성을 최대로 제고한 소통방식이 피드다. 단말기를 통해야 한다는 것, 자신만의 통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같다. 정말 신통한 세상이다.


피드는 등산이다. 정상을 뻔히 눈앞에 바라보고서도 부단히 한 걸음씩 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관계의 정상을 향해서도 좋아요와 댓글이라는 한마디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올라갈 땐 무거워도 내려올 땐 가벼운 것처럼, 팔로잉이 다소 무겁지만 팔로어를 보면 가벼워지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등대다. 망망대해 외로운 섬 하나 바닷길을 알려주는 지표가 등대이듯, 수많은 관계 속에서 외로운 자신에게 통로가 되는 것은 피드다. 등대가 어둠을 밝혀주듯, 관계를 밝혀주는 것은 피드다. 등대는 외롭게 보이지만, 피드는 오히려 따뜻한 게 묘하다.  


피드는 스카이라운지다. 도시의 전경을 두루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스카이라운지라면, 현대인들의 의식 단면을 두루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피드다. 때론 차 한 잔 나누는 낭만이 있듯, 스마트한 캐릭터들이 어울려 좋아요와 댓글을 나누는 여유가 있음은 똑같다.  


피드는 교실이다. 누구나 태어나 사회의 첫발을 딛는 관문이자 배움의 산실인 학교에 가듯, 이제 인간은 어쩌면 마지막 관문인 관계라는 과목을 배우기 위해 피드를 한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윤리 등 피드에는 없는 과목이 없다. 예습, 복습은 정말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피드는 화장품이다. 여성들이 하루에 몇 번이고 변신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화장품이듯, 이제 현대인들은 피드를 통해 매일 변신을 거듭한다. 어떨 땐 연설을, 어떨 땐 애교를, 어떨 땐 도움을, 어떨 땐 비판을 하기도 한다. 택시, 전철 어디든 변신에 제한이 없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기타다. 코드 몇 개와 간단한 스트로크 주법으로 연주가 가능하듯, 흔한 휴대폰과 엄지 손놀림만으로 소통 가능한 것이 피드다. 연주가 뜯는 주법으로 가면 어렵듯, 피드도 의미를 달기 시작하면 어려워진다. 기타가 작은 오케스트라라면, 피드는 작은 포털사이트다.


피드는 밀레니엄 백과사전이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종류의 서적들이 만들어져 왔지만, 피드만큼 오묘하고 방대한 책은 보지 못했다. 피드는 누구나 작자이고 평론가이며 담론의 소비자가 된다. 공과 사를 총망라한 피드는 진정한 문명의 개가이고, 관계정복시리즈다.


피드는 매니큐어다. 여성들이 신체의 말단인 손톱과 발톱에 수없이 지웠다 바르기를 거듭하는 것처럼, 관계라는 끝자락에 수없는 좋아요와 댓글로 표현 반복하는 것이 피드다. 최근 네일아트가 각광받는다면, 피드는 인류 최고의 소셜 아트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피드는 가로등이다. 밤거리를 거닐거나 운전할 때 길을 밝혀주는 것처럼, 점점 분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관계를 낯설지 않게 밝혀주는 것이 피드다. 때로는 은은한 밝기가 낭만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피드도 때론 은근히 다가오기도 한다. 피드는 낮에도 밝혀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피드는 안경이다. 사물을 보는 눈의 피로를 덜어주고 시력을 보완해주듯, 사람을 대하는 수고를 덜어주고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피드다. 제 눈의 안경처럼, 피드도 제멋이다. 안경이 신체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됐듯, 피드도 관계의 일부분으로 정착된다.


피드는 기상대다. 자연현상에 대한 일기예보가 현대문명생활에 중요해졌듯, 이제 사회현상에 대한 일상 예보는 피드가 담당한다. 100% 적중 예보는 힘들지만, 확률을 높이고 있음은 똑같고 분명하다. 이제 관계라는 인류 최대의 기압골이 형성되고 있음이다.


피드는 휴게소다. 운전 중 힘들거나 뭔가 필요할 때 꼭 들러야 하는 곳이 휴게소이듯, 일상 중 허전하거나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거치게 되는 것이 피드다. 평상시 흐름 중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다가도 그곳에만 가면 사람들이 항상 북적대는 것은 똑같다.  


피드는 '복면가왕'이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로운 무대를 만들듯, 관계의 경계를 허물고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로운 라인을 만든 것이 피드다. 피드에는 평가를 통한 탈락이 필요 없고, 재도전 또한 필요 없다. 다만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피드는 샤워다. 뭔가 허전하거나 찝찝할 때 기분전환을 위해 하는 샤워처럼, 울적하거나 누군가와 대화가 필요할 때 가뿐하게 하는 것은 이제 피드다. 각질과 먼지를 걷어내 피부에 촉촉함을 주듯, 피드는 생각의 군더더기와 건조함을 재배열시켜 마음을 축여준다.  


피드는 노래방이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속이 후련하듯, 피드를 올리고 나면 속이 뿌듯해진다. 노래를 대중화시켜 모두가 가수가 된 것처럼, 문자를 단순화시켜 모두가 친구가 되게 한 것은 피드다. 정말 피드 라인 칸칸에는 악보 없는 노래들이 흐르고 있다.


피드는 요리다. 갖가지 재료를 갖고 가열온도와 배합방법에 따라 온갖 음식이 되듯, 갖가지 소스를 갖고 배열 순위와 편집 방법에 따라 온갖 작품이 되는 것이 피드다. 우리는 피드 라인이라는 주방 앞에 섰고, 가장 때깔 나고 맛있는 피드 요리법을 터득하고 있다.  


피드는 시다. 온갖 사물과 개념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시라면, 온갖 경험과 느낌에 의미와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피드다. 인류가 이처럼 가장 짧은 문맥으로 가장 깊고 넓은 관계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시인이 되고 있다.


피드는 발견이다. 피드 라인은 피드 창작실이지만, 사실은 생활의 발견 장소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주 문화가 이처럼 디테일하고, 광범위하게 공유되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직업, 취미, 성격, 성향 등 말로만 듣던 다양성을 비로소 직접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피드는 꿈이다. 잠재된 의식이 파편화된 꿈으로 나타나듯, 잠재된 욕망이 무궁무진한 현실의 언어로 태어나는 것이 피드다. 밑도 끝도 없는 좋아요를 보면,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해몽도 제각각이다. 이런 방대한 꿈의 세계는 정말 처음이다.


피드는 애인이다. 우리는 매일 압축된 메시지로 사랑을 한다. 이제 홀로 남는 법은 없다. 바로 곁에 두고 한시도 잊지 못하는 것은 이제 피드다. 속삭이고 만지고 가꾸는데 쏟아붓는 시간 투자와 애정 공세는 일찍이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헤어지기가 정말 무섭다.




피드는 앨범이다. 사진이 주는 기억 못지않게 추억을 간직한 것으로 피드만 한 것도 없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앨범의 맛은 이제 한 면 한 면 넘기는 터치의 세계로 대신한다.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는 데다, 항상 어디에서든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은 앨범과 다르다.  


피드는 생방송 무대다. 우리는 매일 피드 라인이라는 무대에서 긴장된 표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레디고'와 '컷'이라는 편집 기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즉시 펼쳐 놓아야 하고 내용은 미리 편집돼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즉석 연출자이자 연기자인 셈이다.  


피드는 선물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원초적인 선물이었다면, 문명사에서 가장 큰 공통적인 인류의 선물은 피드다. 우리는 매일 국경을 넘고 인종을 넘고 차별을 넘고 곤경과 가난, 외로움까지 넘어 좋아요와 댓글이라는 선물을 주고받는다. 팔로잉과 팔로어는 덤이다.  


피드는 X-ray다. 육체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획기적 발견처럼, 마음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이 피드다. 우린 매일 피드 라인이라는 방사선실로 향한다. 그리곤 주저함 없이 속내를 드러내 보인다. 이곳에서 우린 모두가 환자이고 의사다.


피드는 대중가요다. 단 4분의 표현으로 사람의 감성을 요동치게 하듯, 단 1컷의 표현으로 감성은 물론 이성까지 사로잡는 것이 피드다. 매일 피드라는 싱글 앨범을 내놓고 있는 우리는 싱어송라이터들이다. 우린 그대로 읊고 있을 뿐 립싱크란 없다.  


피드는 궁합이다. 사주팔자와 역술로 맞춰보듯, 지구촌 사람들이 함께 엮여 서로의 속내를 맞춰보는 것이 피드다. 우리는 피드 라인이라는 역술원에서 시도 때도 없이 점(사진)을 보며 운명을 저울질한다. 좋아요는 그 운명의 시작이고 댓글은 궁합이 맞았음을 뜻한다.  


피드는 숲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자연의 생태계를 이룬 것처럼, 끝도 없는 메시지들이 문명의 생태계를 이룬 것이 피드다. 우리는 매일 피드 라인 숲 속에서 이젠 없어선 안될 문명의 삼림욕을 즐기며 위로받고 있다. 정말 거대하고 울창한 문명 숲이 아닐 수 없다.  


피드는 마우스다. 인간과 컴퓨터의 실시간 소통을 가능케 한 발명품처럼, 인간 최후의 목표인 관계 간 소통을 실시간 가능케 한 것이 피드다. 클릭 한 번으로 다른 정보와 연동시키듯, 피드 한 번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시키는 신호가 놀랍다. 더블클릭은 필요치 않다.


피드는 납골당이다. 수많은 우리의 사연과 외침들이 순식간에 수명을 다하고 밀려나는 것이고, 그 많은 피드들은 열거된 항아리에 봉인된 것처럼 간직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추억의 그곳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끝도모를 항아리를 준비해놓고 있다.


피드는 쉼표다. 삶은 마침표의 연속이지만, 그 연속선상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제 피드라는 쉼표다. 경쟁과 속도는 마침표, 협력과 관계는 쉼표다. 쉼 없는 쉬어감이 바로 피드의 속성이다. 피드는 마침표에 꼬리를 달아주는 쉼표가 되고 있음이다.  


피드는 느낌표다. 삶은 마침표와 쉼표의 연속이지만, 그 연속선상에 끊임없이 의미를 새기는 것은 이제 피드라는 느낌표다. 경쟁과 속도는 마침표, 협력과 관계는 쉼표, 소통과 감동은 느낌표다. 피드는 이제 마침표를 일으켜 세우는 느낌표가 될 것이다.  


피드는 메아리다. 소리가 울려 되돌아오는 것처럼, 의미가 울려 되돌아오는 것은 피드다. 우리는 피드 라인 정상에 올라 좋아요를 외치고, 그 좋아요는 댓글로 메아리친다. 이제 자연이 아닌 문명의 도시에서 메아리가 활개 치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울림이 큰 메아리는 난생처음이다.


피드는 이어폰이다. 귀를 막고 청각의 세계에 빠지듯, 입을 막고 수다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피드다. 너도나도 빠져들지만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소통이라는 외줄에 의지한 채 자신을 향한 세계로 끝없는 질주와 향연을 펼치고 있음은 똑같다.


피드는 질투다. 천명, 다음엔 2천, 5천, 1만 명…. 맛을 알수록 팔로어 부자가 대단해 보인다. 감칠맛 나게 피드를 올리는 인친들을 보면 시샘이 돈다. 무엇보다 친밀한 사람을 곁에 두고 하는 피드는 대개 불평으로 되돌아온다. 휴대폰과 배우자가 뒤바뀌는 느낌이다.


피드는 여행이다. 처음에는 낯설다 익숙해지면 친근해진다. 문득 나설 땐 설렘이 앞서다가 막상 들어가 보면 흥분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피드의 문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다른 얘기와 사람들이 당기는 걸 보면 영락없는 여행이다.


'소셜'은 또 하나의 소설이다. 소설이 어떤 서사와 상상력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피드만큼 강렬한 것도 없다. 오히려 '소셜'에서는 모두가 작자이고, 등장인물이고, 끝도 없는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우리는 21세기 밀레니엄 시대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