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신광면 마을유래에 소개된 우각리
도음산(禱陰山)의 북서 산기슭에 형성된 우각(愚覺), 장당(長當), 송동(松洞)을 합하여 1914年 우각리라 하였고, 1, 2리로 나누었다. 터지못(일명 장당지, 한번 제방이 터졌다 함)의 동편 주변에 고인돌이 4기가 있었다. 우각(愚覺) 우각(牛角)이라고도 부르며, 비학산 쪽에서 보면 와우형상(臥牛形象)의 뿔이 돋은 듯한 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회재(晦齋) 선생의 손(孫) 오형제 중 막내인 이의온(李宜溫)이 입 향하면서 어리석음을 깨닫는 현자(賢者)의 마을이 되라는 뜻으로 우각(愚覺)이라 불렀다 한다. 우각교회가 있고, 정월보름날 1·2리 합동으로 동제사를 지낸다. 여강 이씨 집성촌으로 재실(齋室) 몽애정(蒙厓亭), 오의정(五宜亭), 직전재사(稷田齋舍), 우헌정(愚軒亭)이 있다.
장대이〔長當〕1리인 우각에서 이사 온 여강이 씨들이 이룩한 마을이다. 신라 때 현 마을의 동편 산기슭 우각 가는 길(안들)에 기(奇) 정승이 살 때 그 집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므로 장당(長當)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당 북쪽 300여 보(步) 거리의 송동(松洞)이라는 송림 속 마을에는 20년 전까지 청송심 씨(靑松沈氏)가 15여 호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한다. 서당이었던 도헌정(道軒亭)은 여강 이씨 가문의 재실로 쓰고 있으며, 그 외 석송정(石松亭), 죽하정(竹下亭) 도 있다. 1리 가는 길에 감로사(甘露寺 )가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자신의 도를 즐겼고 [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황미숙의 문명학당 87에서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의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 적(彦迪)'이 되었다. 호(號)는 회재(晦齋), 자계(紫溪), 자계용(紫溪翁)이고, 자(字)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그는 주자를 일생의 사표로 삼아, 아호를 회재(晦齋)라 했는데, 이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이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여 자옥산(紫玉山)에 올라 1532년 자옥산에 서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그는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온 독락 장에서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서재를 독락당이라 하였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는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신조로 삼아 학문에 전념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행보가 여강 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무첨당(無添堂, 이언적의 부친인 성균 생원 이번(李蕃)이 살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에서 거주했으며, 여기서 얻은 측실에게서 서자 이전인(李全仁)을 얻고 살게 된다.
그의 소실은 그의 늙으신 부모를 공양했는데, 회재는 첩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는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박 씨와 결혼했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이통(李通)의 아들이자 5촌 조카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았으며, 서자로는 기녀에게서 낳은 서자와, 양주석 씨로 김포군만호 석귀동의 서녀에게서 낳은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후일 사람들은 이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서자인 이전인을 적자로 올릴 수 있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주자가례를 고집, 가산과 학문은 이응인에게 전수했다.
1544년(인종 1년) 봄, 송인수(宋麟壽)와 백양사(白場寺)에서 만났다. 그해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종 즉위 후, 그는 다시 조광조의 사면 복권을 청하였는데 인종이 동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서경덕, 조식 등의 학문적 명성을 전해 듣고 이들을 조정에 천거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협력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사양하였다. 오히려 서경덕은 그를 보고 인종이 덕망 높은 성군의 재질을 지녔지만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면서 크게 통곡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그를 현인이라 불렀다. 이황은 이언적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언적은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이언적에 연결시켰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으로 학문적 연원을 삼기도 했다.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의 묘소에도 배향되었다. 그 뒤 영남학통의 매개자이자 김종직과 이황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추대되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읍 달전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첫 신도비는 기대승의 글을 1577년(선조 10년)에 이산해가 글씨로 비석에 새겨 넣었으나 후에 망실되었다.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썼는데 현재까지 전한다.
그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 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 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그러나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유향소나 서원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절절한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언적이 유배 생활을 할 적에는 일찍이 책상 위에다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놓았는데, "하늘을 섬기는 데에 미진함이 있었는가? 군친(君親)을 위하는 데에 성실하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지는 데에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 하였다.
"무불경(毋不敬), 사무사(思無邪)"라 했던가. 그 마음에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그 생각에 부정한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五宜亭의 家系
五宜亭의 5代祖父는 諱가 崇禮이고 進義副尉를 歷任하고 贈 嘉善재부 병조판서 兼 同知義禁府事이다.
配는 淸州楊氏인데 縣監 配의 따님이다.
高祖父응 諱가 壽會이고 世宗 13면(辛亥, 1413)에 延日에서 誕生, 武科에 登第하여 進勇校尉 權知 訓鍊院 參軍을 지냈다. 中宗 13年(戊寅, 1518)에 卒하였으니 享年이 88이었고 , 자헌대부 이조판서 兼 知義禁府事로 贈職되었다.
配는 贈 貞夫人 慶州李氏인데 문충공 익제 齊賢 后人 生員 點의 따님이다.
曾祖父는 諱가 蕃이니 成均館 生員으로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이다.
配 孫氏夫人은 敵愾功臣 鷄川君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諡 襄敏公 昭의 둘째 따님이다.
祖父는 諱가 彦迪, 호는 晦齋이고 諡號가 文元이니 行職이 崇政大夫 左贊成이고 贈職이 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에 追贈되었다.
配는 貞敬夫人인데 咸陽朴氏인데 宣務郎 崇阜의 따님이다.
父는 諱가 應仁이니 靈山縣監을 歷任하고 司饔院 判官으로 贈職이 承政院 左承旨이다.
配 贈 淑夫人 朴氏는 參奉 珵의 따님으로 贈 숙부인 仁同 張氏는 翊衛司 洗馬 應機의 따님이고 贈 淑夫人 月城손 씨는 定虜衛 光晬의 따님으로 吏曹判書 仲暾의 曾孫女이다.
五宜亭은 諱가 宜溫이고 字는 慄然이며 初諱는 宜澤이다.
그는 선조 10년 丁丑(1577)에 良佐村 本家에서 아버지 應仁과 어머니 孫氏 사이에 태어났다.(이원용, 晦齋先生年表, 國譯 晦齋全書, 黙民記念事業會, 서울, 331~332쪽, 柳龍佑譯, 국역 五宜亭文集, 1997,56쪽)
상기한 五宜亭의 家系와 配의 家系를 槪觀해 보면 兩家의 子孫들이 儒林의 집안들로서의 일찍이 儒敎의 濡染(유염:유교의 물이 들림)으로 儒學을 工夫하고 그 道理들을 習得하여 어느 世代에도 官吏가 끊이지 않았다.
(五宜亭 祖上의 行職과 贈職 및 配位 )
위 표에 의하면 五宜亭의 조상 5대 중 5대 조부와 高祖父는 武人으로서 活動하여 그에 상응하는 行職과 贈職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曾祖父와 弔賻 및 父는 文人으로 活動하여 行⦁贈職을 國家에서 받았는데 특히 五宜亭의 조부인 晦齊先生은 政治人으로서 또는 학자로서 많은 業績을 남기었다.
上述한 바와 같이 傳統的인 儒敎家庭에서 태어난 오의정은 5형제 중 5남으로 처음에는 家學을 學習하면서 生長을 하였고, 그다음은 成童期를 맞이하여 家學보다 次元이 높은 學問을 自學自習하면서 自身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으려고 苦心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經史子集을 비롯한 聖賢의 學을 工夫함과 同時에 兵書 및 武術에도 깊은 關心을 가져 智略과 鍊磨에 盡力하였다고 생각된다.
오의정의 유래
오의정 문집의 「오의정중건기(五宜亭重建記)」에 의하면 “오의정 선조께서 전상의 몸으로 이곳 우각리(愚覺里)에 입촌하시어 몇 칸의 초옥을 세우고 거기서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쳤으니 그 집이 바로 이 정자이다.”라고 써져 있다. 이 중건기는 1883년(고종 20년)에 자헌대부 행 용양위 대호군 겸 지경연춘추관 의금부사 일선 김익용(資憲大夫 行 龍驤衛 大護軍 兼 知經筵 春秋館 義禁府事 一善 金益容)께서 썼다.
이 보다 17년 앞선 1866(고종 3년)에 달성인 서상춘(達城人 徐相春)이 상량문을 썼으니 그 발기에서부터 중건을 마칠 때까지 무려 20여 년의 세월에 걸쳐 1884년에 완공된 것이다. 당시에 지은 오의정 정자는 관리 부실로 1960년대에 무너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중의 몇몇 어른들이 노심초사하시어 비록 원형대로 복원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1972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 재건하였다.
鄕射廳揭板文
府尹爲蠲給事本州故軍資監直長李公宜溫卽晦齊先生孫也 襲箕
裘訓誨之方孝友素著當龍蛇搶攘之亂忠勇克壯杖劍灑淚烈丈夫之
奮不顧身傾囷助餉都統制之賴以紓力名登閫啓惜未蒙策功錄勳之
典職辭軍資尤可見急難攘夷之義凡有好是懿德之同衷孰不聞其風
而興歎迺於萬曆甲寅之歲特垂百負蠲復之規郡太守軫念逈出尋
常鄕射堂揭板俾圖永久不幸雲仍之中替至有煙役之通融猶將十世
之可宥係是一邑之欠典况於夫子之孫以加以敵愾之功者乎 嗚呼
生能澤民沒可祭社固非一行一節之可比殆若是歲是事之有待玆按
復戶之己例俾伸公議之久鬱不惟崇德而象賢亦宜課忠而勸孝揆諸
古因以刻揭繼自今永爲遵行其宗戶段諸般襍役一切蠲減崇禎紀元
後四甲寅三月
향사청에 걸렸던 「향사청게판문(鄕射廳揭板文)」의 내용
〔국역〕 부윤이 蠲給 하오니 본 고을의 옛 군자감 직장 이공(李公) 의온(宜溫)은 곧 회재선생의 손자이다. 대대로 전해오는 교훈을 이었으니 효우의 착한 행실은 본래부터 드러났고, 임진년에 어수선한 병란을 당하여 충의와 용맹이 남달리 장하였다. 칼을 잡고 눈물을 뿌렸으니 열렬한 대장부로 분연히 일어나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가산을 기울여서 군량을 도왔으니 이순신 통제사가 그를 힘입어 애로를 벗어나 힘을 폈다.
그 이름이 곤계(閫啓)에 올랐으나 애석하게도 공훈을 포상하는 은전을 받지 못했으며, 군자감의 직장직을 사양하니 국난에 구제하고 오랑캐를 물리쳤는 의리를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진심이 있으면, 그 누구가 그러한 유풍(流風)을 듣고 감탄하지 않겠는가? 지나간 광해군 6년 갑인년에 백부 견복(蠲復)의 국정이 특별히 내려졌다. 고을 원이 성의를 다 했으니 예사롭지 않았으며, 향사당에 판각문을 게시하여 영원함을 도모했다. 불행하게도 자손들이 중간에 쇠잔하여, 심지어 여러 가지 부역까지 통했으니 오히여 십 대(十代)토록 면제하고 도울지라, 한 고을 법도의 결점이 있었도다. 더구나 회재선생 손자로서 석개의 높은 공훈이 더함이겠는가? 아! 살아서는 백성에게 은택을 주었으니, 사후에는 제단에 향사함이 옳았도다. 진실로 한 가지의 행실이나 한 가지의 절의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마치 이러한 일의 기다림이 있었는 듯하였다. 이에 복호(復戶)의 전례를 살펴서 공의(公議)의 오랫동안 억울함을 펴 주었다.
다만 덕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을 뿐 아니라, 또한 충의심을 고취하고 효도를 권당함에 마땅했다. 옛 것을 본받아서 각판(刻板)을 게시하니, 지금부터 이어가서 영원토록 준행(遵行)한다. 그 가문의 호역(戶役)과 제반 잡역(雜役)을 일체 감면한다.
철종 5년 갑인(1854년) 3월
오의정 문집 발문(跋文)
嗚呼龍蛇之難距今三百載矣 當時文武諸公勤王立殣之蹟惑銘之
太常惑收之野史惑載之文集而雖寸勞咫功畢現盡露無有隱而不彰
者源冑每得而讀之未嘗不淚潸潸欲下何也 吾先祖五宜亭府君亦
當日勤王之一也 春秋在舞象之歲念家世之屢受 國恩忘身赴難從
朴武懿李忠武公幕下竭力轉漕運籌贊畵大被二公將許至於柚島之
役身先士卒衝冒矢石斬馘甚多 統府有力戰之啓朝除軍資監直長
之典則府君地忠勤義烈何啻寸勞咫功之比而顧通塞有命顯晦有時
旣不入於太常野史氏之採錄而遺文刊布亦未遑克圖歷世旣久屢經
鬱攸僅有詩文若干篇及龍蛇日錄在耳而亦爲蟲魚所嚙食往往斷爛
不可讀豈非子孫之隕心痛恨者耶 記曰先祖有美而不知不明也不
傳不仁也不仁不明肯曰有后玆庸大愓怛于心遂與諸宗族合謀發巾
衍而第次之合諸家附錄爲一冊請丁乙于秉筆之門因付剞劂氏役旣
訖不揆猥謹私識所感于中者如右云爾旃蒙赤奪若葽夏下澣十二世
孫源冑泣書
〔국역〕 아! 임진년의 왜란 이후로 지금까지 삼백 년이 되었다. 그 당시 문무제공들이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심신을 바쳐 공훈을 세운 자취를, 혹은 국사에 새기고 혹은 야사에 수록하고 혹은 문집에 등재하여 비록 조그마한 공로라도 다 나타내어 숨겨진 것이 없었다. 내가 매양 그러한 사적(史籍)을 얻어서 읽을 적에 저절로 눈물이 흐르려고 하였으니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의 선조 오의정 부군께서도 역시 그 당시의 어린 나이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은 가문임을 생각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국난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박무의공(朴武毅公-영해태생으로 본관은 무안박 씨이며 당시 경주부윤으로 경주성 탈환작전에 성공하였으며, 당시 전투에 오의정공은 군자감으로 참전하였으며, 후일 이충무공에게 오의정공을 천거하였다)과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막하로 달려가 성력과 지략을 다하여 군량의 수급과 전략의 창안 보필로 양공으로부터 많은 장려와 칭찬을 받았다.
유도(柚島)의 전투에 있어서는 몸소 사졸(士卒)에 앞서 적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진격하여 많은 적을 참획하였다. 통제부에서 공의 역전 감투한 공적을 조정에 진달 하여 조정에서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의 은전이 제수되었으니 부군의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친 의열(義烈)이 어찌 조그마한 공로에 비유할 바 이겠는가? 생각건대 통하고 막히는 것이 운명이 있고 나타나고 숨겨지는 것이 시기가 있었다. 이미 국사와 야사의 기록에 들어있지 아니하였으며 유문의 간행 또한 여러 대를 내려오며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이라 여러 가지 재난을 겪은 나머지 시문 약간 편과 용사일록(龍蛇日錄)이 있을 따름이며 그것 역시 벌레의 침식으로 왕왕 손상되어 읽어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예기(예기)에 이르기를 “선조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분명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면 어질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어질지 못하고 분명하지 못하면 어찌 후손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이에 마음이 두렵고 슬퍼 마침내 여러 종친들과 합의하여 상자 속에 들어있는 원고를 들추어내어 차례 하고, 제현들의 글을 부록으로 하여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 병필(秉筆)의 선비에게 교정을 청하고 따라서 인쇄에 부칠세 나의 참람함과 외람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마음에 느낀 바를 위와 같이 삼가 기록하였다. 을축년(1925년) 음력 사월 하한에 십 이대 주손 원주(源冑) 눈물을 흘리며 쓰다.
士林呈巡相文
사림(士林)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글
伏以好賢仁也尊賢義也人莫不好賢而好之之心未必盡篤人莫下
尊賢而尊之之誠未必皆實而况生等之晩生蔑學行不足以見重於世
言不足以見信於上則好賢之心雖不敢自後於衆人尊賢之誠恐無以
動閤下之崇聆而百世之下不可泯者公議也 萬口之上不可掩者輿
頌也 前輩之齊籲積有年所而雲仍之嗚寃己爲券軸則 生等添在士
類又豈敢終焉泯黙也哉 謹按故軍資監直長李公宜溫卽我先正文
元公晦齌先生之孫也 生而容姿粹異器度沉遠未嘗疾言遽色雖盛
署祈寒在親側必飭衣帶及長見解精博於武藝赤皆傍通而常自鞱晦
故人未有知之者大庵朴公惺一見嗟異曰人樂有賢父兄子之謂歟因
贈詩以勉之公應聲而和其末聯曰 知有修身地從今學聖經於此可
見其自少期待己不小而其後來成就之有自來矣 龍蛇之難公年纔
十六奉親避兵于深峽乘夜搬運以資供奉極其誠力一室賴而全越明
年丁艱雖在奔竄中必如禮無憾其時見聞莫不豔服焉 才釋服輿諸
義將合議討賊丁酉賊之再猖也 天兵五萬下來知府武毅朴公毅長
委公監捧之任措畫得宜轉餉不匱及應選赴統營以書訣家人曰吾家
世受國恩當此板蕩之際豈可晏然在家遂仗劍卽往閑山島忠武李公
舜臣輿語大奇擢置參佐軍中機務多咨訪而採納焉 時兵荒連年軍
儲艱乏傾家貲以助兵食忠武公啓聞于 朝除爲軍資監直長公以爲
無功濫 恩辭不就戊戌十月初二日柚島之役公身犯砲鏑所殺傷甚
衆而公亦被創幾殊而甦忠武公又以力戰褒啓越旣月忠武公殉節于
陣公亦輿疾而歸 翌年十二月十六日自 上有許通 傳敎蓋忠武公
約束不以斬馘多寡爲公次而以力戰爲首故其時以力戰啓達之人皆
蒙顯賞而公丁百年沈痼之世不謨仕進決意隱遁故許通 傳敎所以
遂其志也 事己而歸卜築於閒曠之地名其居曰五宜蓋取諸宜兄弟
宜室家宜山水宜農桑宜隱遁底意也 有遺集詩文若干篇皆發於性
情觸境遇物之作而未嘗有憾憤切感之意 其志氣之偉然亦可槩矣
嗚呼吾夫子有言曰事親孝故忠可移於君 曾子曰戰陣無勇非孝也
韓文公曰無事於職以與國謀忠義人也 公亦其人也 夫嗚呼以家世
則老先生象賢之孫以閥閱則忠武公贊畫之賓而其孝友之純之如此
忠義之卓異又如此迄于今數百年尙未蒙 貤贈之恩士林之齎鬱猶
屬餘事而 朝家之欠典又復何如哉 况今 聖明臨 御覆盆畢照至于
閭巷匹遇一行一節之人無不甄發而章顯之則公之忠孝夫豈徒爲一
行一節之倫歟 伏惟閤下望重山斗職在詢宣誠篤崇賢野無遺佚則
此正 生等齎籲之辰也 伏願留神俯矚卽爲啓達俾蒙 褒贈之典千
萬屛營祈懇之至 呈府伯文煩不盡錄
〔국역〕 사림(士林)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글
갑인년(1854년) 음력 9월 일,
이학원(李學元) 남유영(南有永) 최세정(崔世貞) 등 183 명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은 인(仁)이요,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은 의(義)이라, 사람들이 어진 이를 좋아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좋아하는 마음이 반드시 다 독실하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어진 이를 존중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존중하는 성의가 반드시 다 성실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저희들은 후 생멸학으로 행실이 세상에 중하게 보이지 못하였고 언어가 윗사람에게 신의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비록 감히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진이를 존숭하고 성의가 합하(閤下)의 들으심을 움직이지 못할까 두렵사오나 먼 백세(百世)의 뒤에까지 민멸되지 않은 것은 공의(公議)이며 많은 사람들의 말을 가릴 수 없는 것은 사회의 칭송이옵니다. 선배들이 일제히 호소한 것이 여러 해 쌓였으며, 자손들이 명원(鳴寃) 한 것이 권축(卷軸)을 이루었으니 저희들이 사류(士類)의 말석에 끼어있으면서 어찌 감히 끝내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 보건대 옛날 군자감직장
(軍資監直長) 이의온(李宜溫) 공은 곧 우리 선정(先正) 문원공 회재선생(文元公 晦齋先生)의 손자이옵니다. 나면서 용모와 자질이 순수하고 뛰어났으며 재지와 도량이 깊고 넓어 일찍이 빠른 말과 급한 모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심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라도 어버이 곁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복을 정제하였습니다. 성장하여서는 견해가 정밀, 해박하였으나 항상 스스로 숨겼던 까닭에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암 박성(大庵 朴惺) 공이 한 번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감탄하여 이르기를 “ 사람들이 어진 부형을 둔 것을 즐겁게 여긴다고 한 말이 그대를 말함이다”라고 시를 지어 주면서 권면한데 공이 즉석에서 화답하여 이르기를 수신(修身)할 곳 있었음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성현의 글을 배우련다( 知有修身地 從今學聖經)“라고 하였으니 이 시에서 공이 어릴 때부터 기대가 적지 않았으며 훗날 성취한 것이 그 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공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로 어버이를 모시고 깊은 산골짝에 피란하여 밤으로 양식을 가져다가 조석 진지를 받들어 성력을 다 하니 그로 인하여 한 집이 온전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어버이 상고를 당하여 비록 피란 중이었으나 초종장례를 예법대로 유감없이 거행하니 그때 보고 들은 이가 모든 탄복하였으며 겨우 상기를 마치고 나서 여러 의장(義將)들과 합의하여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정유년 재란에 명나라 응원병 오만 명이 내려올 새 부윤 무의공 박의장(武毅公 朴毅長)이 공에게 군량보급의 임무를 맡긴데 공이 원활하게 운반, 수급하여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이어 문무겸전한 참모로 선발되어 통영의 이충무공 진영으로 달려갈 새 가족에게 서찰로써 결별을 고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러한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어찌 안 연하게 집에 있어서야 되겠는가?”하고 드디어 한산도(閑山島)로 달려갔습니다.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공과 더불어 말을 해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며 참 좌(참 좌)로 발탁하여 군중기무를 많이 자문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 대 여러 해 난리로 인한 흉년으로 군량이 떨어질 지경이었거늘 공이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도왔습니다. 이제 충무공이 그 사실을 조정에 전달하여 군자감 직장이 제수되었으나 공이 아무런 공적도 없이 외람되이 나라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무술년 시월 이일 유도(柚島)의 싸움에서 공이 적의 포탄과 화살을 무릅쓰고 싸워 많은 적을 참살하였으나 공도 또한 적의 화살을 맞아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소행한데 충무공이 또한 용전감투한 공적을 조정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다음 달 충무공이 전진(戰陣)에서 순국하고 공도 또한 병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듬해 섣달 십육일 전교가 내려졌으니 대개 충무공이 약속대로 적을 참살한 수의 다과로 공적을 삼지 아니하고 힘써 싸운 것으로 수공(首功)을 삼았습니다. 까닭에 그때 싸운 사람으로 진달 된 사람들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현저한 포상을 받았으나 공은 평생토록 침고(沈痼)의 세상을 만나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도모하지 아니하고 은둔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 끝난 뒤에 향리로 돌아와 한가롭고 넓은 곳에 터를 잡아 정자를 세우고 거처하면서 이름을 오의정(五宜亭)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형제간에 마땅하고, 처자에게 마땅하며, 산수가 마땅하고, 농사에 마땅하며, 은둔에 마땅했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아! 공자가 이르시기를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을 행한다.”하고 증자가 이르기를 “전쟁에 나가서 용맹 없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한문공(韓文公)이 이르기를 “직무에 맡은 일이 없는데도 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도모하는 것이 의인(義人)이라 하였으니 공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 가문의 세계(世系)로 말하면 노선생(老先生)의 어진 것을 본받은 손자이요, 공적의 지위로 말하면 충무공의 방략을 도운 막빈(幕賓)이었으며, 그 순수 지극한 효우가 이와 같았고 남달리 뛰어난 충의가 또 이와 같았는 데에도 수백 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포상의 증직을 받지 못하였으니 사림의 원한은 오히려 여외의 일이라 하겠사오나 조정의 흠전(欠典)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물며 어지신 임금님이 보위에 오르시와 밝은 빛이 구석진 데까지 다 비치어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의 한 가지 행실과 절의의 무리에 비유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합하께서는 태산(泰山) 북두(北斗)처럼 높으신 명망으로 순선(詢宣)의 직위에 계시와 어진 이를 높이는 정성이 독실하시고 초야에 버려진 어진이가 없었으니 이때가 바로 저희들의 원한을 호소할 때 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유념하시고 굽어 살피시와 즉시 조정에 진달 하시어 공으로 하여금 포상으로 증직의 은전을 받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원하옵니다.
이 탄원서는 公 卒後 200년 뒤 철종 5년 갑인년 1854년에 사림 183명이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13.4. 여강 이씨 오의회보에서 발췌함
경주壬亂義士 倡義錄에서
179~180쪽
○ 이의온(李宜溫)
초명은 宜澤(의택)이요 자는 율연(栗然)이며 호는 오의정(五宜亭)이고 본관은 여주(驪州)이니 고려(高麗) 향공진사(鄕貢進士)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증 영의정(贈 領議政)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언적(彦迪)의 손자이며 영산현감(靈山縣監) 증 좌승지(贈 左承旨) 응인(應仁)의 아들로 선조(宣祖) 10년(1577)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良洞里)에서 출생하였다. 유소시부터 지용이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의활(宜活), 의잠(宜潛)과 함께 창의거병하여 동년 9월 8일 경주성복성전에 참전하였다.
공은 백형 의윤(宜潤)을 대신하여 군량책(軍糧責)을 맡아 여러 지역으로부터 군량을 원할이 조달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의 천거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로 가 보좌관에 임명되고 고금도(古今島), 진도(珍島), 추도(抽島)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때 충무공(忠武公)이 공의 전공을 조정에 상계하여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에 제수되었다.
동 28년(1595) 12월 불구사에 진을 치고 있던 수문장(守門將) 황희안(黃希安)과 서로 편지로써 연락하여 경주 의병 군과 함께 팔공산(八空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동 29년 9월 29일 팔공산희맹(八空山會盟)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방어사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지휘하는 7월 21일의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에도 참가하여 열읍의사(列邑義士)들과 수성(守城)에 공을 세웠다.
동 31년(1598) 10월에는 다시 이순신(李舜臣) 장군 진으로 달려가 추도(抽島) 싸움에서 선봉장으로 적을 물리치다가 어깨에 부상을 입으니 충무공(忠武公)께서 친히 화상을 뽑아주고 상처에 독을 빨아 치유케 하면서 나의 훌륭한 보좌관을 잃을 뻔했다고 크게 격려하였다.
參考文獻 東京誌, 壬辰抗爭史, 龍蛇世講錄, 五宜亭文集
오의정의 글
五宜亭은 서기 1577년에 出生하여 享年60에 卒하였다. 오의정이 柚島에서 戰傷을 입은 이후 얼마 안 되어 神光縣 愚覺里에 定住하였다.
뒷날 神光縣 愚覺里에 별장을 설치하여 정자를 세워 거처하며 五宜亭이라 명명하였으니 형제간에 마땅하고 실가(室家: 가정 또는 부부)에 마땅하며 산수가 마땅하고 농사에 마땅하며 은둔에 마땅하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매일같이 자제들의 교훈으로 일삼고 때때로 산수의 사이에서 노닐고 읊으며 時事의 장단점에 대하여서는 개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의 본래의 뜻이었다. 그리고 詩集 약간 편이 남아있다. (五宜亭文集, 151쪽)
오의정 (五宜亭)의 시
1. 寓中病明 二首(우거 중에 병을 앓으며 읊음 두 수)
宿霧隨煙着柳條
一犂山雨更蕭蕭
爲憐百物生生氣
獨我癯形日漸消
묵은 안개연기 따라 버들가지 묻었는데
한보자락 산비 내려 또다시 쓸쓸했다
백물은 그 모두 생기가 나있는데
나 홀로 야윈 모습 날로 더해 애처롭다.
一病支離月再來
琴書留案沒僗尼
安得刀圭承快樂
落花三逕好含盃
한 번 얻은 병으로 몇 달을 지났으니
책상 위의 거문고와 책들은 먼지 속에 묻혀있네
어이하면 명의 얻어 쾌락한 몸으로
낙화 쌓인 삼경 ¹에서 술잔을 들어 보리.
1. 소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은 동산 속의 오솔길
寓中病明 二首를 음미하려면 五宜亭이 戰傷을 입은 정황을 간단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五宜亭은 서기 1598년 선조 25년 22세 10월 초2일 柚島戰鬪에서 왜적의 독화살을 왼쪽 어깨에 맞아 실신하였는데 충무공이 편비(오늘날 전속부관)를 시켜 부축 보호하여 화살을 뽑아내니 뽑은 자리에 독이 남아있어 원수(元帥:이순신 장군)가 친히 피를 빨아 내었고, 마침 여러 가지 좋은 약을 얻어 치료하니 다행히 살아났다.
(오의정 문집 124~126쪽 참조)
그 해 11월 19일 충무공이 진주에서 순절하였고 五宜亭도 병을 안고 그 이듬해(1599년) 향리 良佐村으로 돌아왔다.
그 해 섣달 16일 傳敎(전교:임금님이 명령을 내리는 것)가 내려왔다. (오의정문집 201쪽)
柚島戰鬪에서 왜적이 쏜 독화살은 보통 화살이 아니고 살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독이 인체에 스며들게 되면 독의 량과 시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치료한다 하더라도 그 기간이 매우 길고 매우 쇠약하게 되어 활동에 많은 지장을 주는 것이다.
다행히 五宜亭은 20대 초에 전상을 입고 그 당시에 빨리 좋은 약을 복용하였기에 60세까지 생존하였으나 장년기간에는 여러 활동에 그 전상의 영향이 다소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寓中病明 二首는 아마 良佐村에서 다음 해 즉 서기 1599년 오의정 23세일 때 愚覺으로 이주해서 가장 먼저 작시한 것으로 보인다.
寓中病明 二首는 환자가 투병하면서도 느끼고 생각하고 과거의 활동을 회고하며 여생을 설계해 보아도 그런 것을 실행하기가 어렵게 됨으로 써 외롭고 쓸쓸하고 심신이 약해지는 모습이 처량해지는 것을 서글프게 느끼는 면과 아울러 유명한 의원을 만나서 건강한 사람이 되어 바람직한 생활을 영위해 보고 싶은 일단면을 나타낸 시라고 말할 수 있다.(오의정 이의택의 생애와 업적연구 82쪽)
2. 竹洞炊烟(죽성동의 밥 짓는 연기)
竹外人居凡幾家
炊烟朝慕巧相遮
溪邊線柳徧多意
織作靑靑一疋紗
대밖골에 사람이 몇 집이나 살기에
아침저녁 취연이 교묘하게 가리었네
시냇가 실버들은 지나치게 정성이 많아
푸른빛을 짜고 한 필 비단 만들었다.
竹洞炊烟는 농촌풍경 가운데서도 특히 아침저녁의 밥 짓는 연기, 학이 많이 있는 동네 앞 나무 숲, 시냇가의 실버들 등의 풍경을 중심으로 시화화한 것이다.
3. 鶴峯秋月(비학산 가을달)
遼陽當日老丁仙
飛入鷄林落葉天
明月滿空風露冷
一聲如聽訴千年
요양 당일에 늙은 정선 ¹ 이
낙엽 지는 계림의 하늘에 날아들었도다
명월은 공중에 가득하고 바람과 이슬이 찬데
한 소리는 천 년 전 하소연 ²을 듣는 듯하여라
¹요동의 정영위가 명허산에서 신선의 도술을 익혀 학이 되어 다시 요동으로 날아왔다는 고사
²신라 천년 하소연
학봉추월은 비학산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이 비학산은 매우 높고 경치나 모양이 빼어나서 옛날부터 명산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산 일대의 주민들은 영산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까지 신성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4. 法社尋僧(법광사스님을 찾아)
東林久負遠公期
雲水幽懷一夢如
詩話近來頻帶俗
石門斜日信筇枝
동림 ¹에서 오래도록 그대 기약 저버리니
운수 ²성의 깊은 심정 꿈속에서 알았도다
근래에 시화 ³로 속대를 띠었더니
석양에는 절간을 거닐 줄 믿어지네
¹동쪽의 숲 우각을 말함
²마을 다니며 동냥하는 스님
³시에 관한 이야기
법광사는 신라시대에 건립되었는데 사찰의 크기가 500餘間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새로 건립한 법광사의 바로 왼쪽 위 밭에 매우 큰 연화대가 남아 있다. 그래서 처음 건립된 법광사는 청하 보경사와 비슷한 수준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의공이 법광사의 고승들과 교분이 있어 詩話를 하였다면 주제는 다를지라도 상호 간의 정분은 깊어지고 作詩에도 도움이 외었으리라 본다.
5. 奉次大庵朴公惺贈韻(대암 박성공이 읊어 준 시를 받고 차운함)
依歸思變質
腐草化秋鎣
知有修身地
從今學聖經
어진 사람 의지함은 자질변화 원함이다
썩은 풀이 가을밤의 반딧불로 화하듯이
몸 닦을 곳 있었음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성현의 글 배우리라
“朴惺公이 五宜亭을 한 번 보고 나서 매우 감탄하여 이르기를 사람들이 어진 부형을 둔 것이 즐겁다고 하였으니 이 아기가 바로 그러한 집의 아이라 하고 시를 지어 주면서 격려하였을 바로 그때“(五宜亭문집 141쪽) 五宜亭이 박성에게 준 것이다.
五宜亭이 14세 때 지은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어진이에 의존해야 자질변화 할 수 있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하듯이 수신할 기본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성현의 글 배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를 고사에서 인용해 가면서 지은 그 능력은 선천적인 지능이 높고 “資稟이 英敏하고 氣宇가 너그럽고 큰 것”(五宜亭문집 140쪽)과 後天的으로는 가학을 폭넓게 履修하기 시작하여 經史子集을 통달한 수준에 이르게 된 것 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 登鳳凰臺次州尹韻(봉황대에 올라 부윤의 시를 따라 지음)
鳳凰臺上坐
百里我東州
群峀重重立
長江滾滾流
梅陰閒簿訴
來嶼息烽憂
今日昇平樂
猥從太守遊
봉황대 ¹에 올라 바라보니
우리 고을 백리에 뻗쳤구나
뭇 산은 첩첩이 둘러섰고
긴 강은 굽이쳐 흐르네
관아의 부소 ²가 한가롭고
해안의 봉화 ³ 근심 그치었네
오늘 태평스럽게 즐기면서
태수 따라 즐겁게 거닐도다.
¹(경주의 신라시대 왕릉)
²(억울한 일을 문서로 기록하여 호소하는 곳)
³(위급할 때 불을 올려 알리는 곳)
시에 나타난 慶州府尹은 淸愼齊 朴毅長인데 판관으로 2년 6개월(1591. 1.1~1593.7.7. 임기)을 역임하고, 부윤으로 부임하여서 1599년 5.19일에 성주 목사 겸 우도 방어사로 떠났다.
五宜亭은 일찍이 朴毅長의 幕下에 있으면서 그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며 맡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그로부터 신임을 받아, 이순신이 통제사일 때 인재를 선발함에 朴毅長이 五宜亭을 추천할 만큼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이다.
시의 애용은 상반은 五宜亭이 봉황대에 올라가서 주위의 산천이 100리나 뻗쳐 있는 수려함을 감상한 것이다.
하반은 壬亂後 관청이 한가롭고 烽火에 근심 없으니 오늘은 태수와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7. 奉次忘憂堂郭公再祐(망우당 곽재우공의 시를 차운함)
簷領盡日客懷長
虛欖風生一陣凉
幸托追隨知氣日
慇懃厚意亦難忘
종일토록 처마방울 나그네 회포만 커지는데
빈 난간에 바람 일어 시원도 하여라
다행케도 그대 따라 민족정기 알던 그날
은근하고 후한 뜻을 잊기가 어려웠네
上半은 五宜亭이 직접 망우당의 사당인 忠翼祠에 가서 정숙하고 인적이 드물며 빈 난간에 바람이 부는 곳에 있으니 마음에 품은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을 시화한 것이다.
하반은 五宜亭이 망우당에 따라가서 義氣를 알게 된 그날의 감명은 아직도 잊지 않으리라.
五宜亭의 시는 전반적으로 볼 때 寫實的인 것, 행동적인 것 등은 일반적인 문장에 가까우면서 시의 상반에 서술되어 있는 반면에, 감상적인 것 추상적인 것 등은 미화하여 시의 下半에 서술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8. 兄江舟中次州尹權公泰一韻
(형산강 배안에서 주윤 권태일이 운을 차운함)
淸秋九月學仙遊
百里長江汎汎舟
永日梅陰無一事
好將琴鶴戱眠驅
맑은 가을 구월 달에 신선놀음 배우려고
백리에 뻗은 장강 두둥실 배 띠웠네
오래도록 관청에서 하는 일이 없었으니
좋을시고 거문고와 학으로 잠든 백구 희롱했네
경주부윤 군태일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군태일의 운을 次韻하여 초청에 응한 인사들이 작시를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각 구절마다 매우 적절하게 미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첫 째 구절에는 놀음을 신선놀음으로
들 째 구절에서는 배 띄웠네를 두둥실 배 띄웠네로
세 째 구절에서는 하는 일은 오래도록 관청에서 하는 일로
마지막에서는 거문고... 를 좋을시고 거문고...로 미화한 것이다.
9. 五宜亭(오의정)
洞裏烟霞自作村
風塵斯世別乾坤
靈尨不吠人蹤斷
山鳥聲中晝掩門
골짝 안 노을 속에 스스로 하 농막을 지었으니
풍진 속의 이 세상에 별천지의 세계로다
사람 자취 끊어져 삽살개도 짖지 않고
산새들의 노래 속에 낮에도 문 닫았네
五宜亭이 만년에 신광현 우각리에 정자를 세워 오의정이라고 명명했고, 오의정 정자는 五宜亭이 살아가는데 잘 어울리거나 알맞다는 뜻이다.
五宜亭의 이 뜻이 여려 시 죽 閒居(1), 閒居(2), 閒居(3), 시 등에 반영되어 있는 것도 본 연구에서 추구해 볼 것이다.
상기한 오의정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골짝 노을, 은둔, 적적, 새울음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산과 새울음, 은둔 등은 마땅함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閒居(1) 한가롭게 살다
數椽來結碧溪林
門掩松篁客不尋
閒臥北牕無一事
短編爭和暮禽音
푸른 시내 숲 속에 초라한 집 지어 놓고
송죽으로 문을 가려 찾는 이가 없었다네
북창에 누워있어 아무 일이 없었으니
짧은 시 다퉈 읊는 황혼의 새소릴세
閒居(2)
雲谷幽深俗客稀
老松陰下晝關扉
溪堂臥聽今秋事
日夕農談亦是非
구름골짝 깊숙한 데 찾는 사람 드물어서
노송 그늘 아래 낮에도 사립문 잠그었다
계당에 누워서 금년 추사 들어보니
아침저녁 농삿말을 옳고 그름 다투었네
閒居(3)
早歲奔馳多涉險
晩來卜築自閒心
松陰時聽兒童語
不見島夷恨是深
젊어서 달린 전장 험난을 많이 겪고
늙어서 새 터 잡아 집 지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소나무 그늘에서 때때로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왜적을 보지 못해 한이 깊었단다
한 거 시 삼 편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閒居詩(1)에서는 푸은 시내숲에 집이 있어도 방문객 없고, 온종일 한가하게 지내다가 저녁 무렵 새소리 듣는다는 시이다.
閒居詩(2)에서는 깊은 산골짝이라 인적이 드물어서 사립문 열 일 없고 농부로부터 금년 농사 들었다는 것이다.
閒居詩(3)을 보면 젊을 때는 전장에서 험난을 겪고 늙어서 집 지어 사니 한가해서 때때로 아이들 말을 들어보면 왜적 못 본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라는 내용이다.
閒居詩 三篇의 내용 전체를 보면 다섯 가지 마땅한 것에 대한 것은 거의 없고 한가롭게 하루를 지내고 인적이 드물어서 쓸쓸함이 다소 풍기면서도 오의정 정자에서 마음 편하게 지낸다는 것을 시화한 것으로 보아진다.
10. 興海倅惟烏島(흥해군수와 오도에서 즐기다)
盤盤烏島石
乳在海中流
天地無窮壽
不爲顚覆憂
반반한 오도바위
해중에 떠 있네
천지와 같이 무궁하니
전복우려 없었다네
遊曲江戱呈興海倅(곡강에서 노닐며 흥해 현감에게 읊어줌)
三年東海客
今日曲江仙
蓬島知相近
白頭不足憐
3년간 동해의 나그네 몸
오늘은 곡강의 신세일세
봉도와 서로가 가까움을 알았으니
늙음도 서럽지 않았도다
위의 두 시는 흥해군수과 현감과 함께 흥해 앞바다와 곡강에서 이틀 동안 즐긴 것을 시로 읊은 것이다. 그런데 흥해와 곡강은 신광의 우각에서 10km 정도여서 그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셋째 형인 설천공 의활이 흥해군수를 역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두 시의 내용을 보면 五宜亭과 군수 현감뿐만 아니라 그 외 그곳의 유지들과 함께 즐겼다는 것이다.
또 첫째 것은 오도의 기반이 매우 반반하다는 것을 읊은 것이고, 둘째 것은 五宜亭이 신광 우각에 이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하루만은 곡강의 신선이 되었으니 백두로 서럽지 않다는 것을 시로 읊은 것이라고 본다.
11. 遊泉谷寺(천곡사에서 노닐다)
假日尋泉寺
草中僅有程
樓高風易得
山近月難迎
澗島奇聲亂
龕雲瑞氣榮
無知村女輩
祈佛願重生
한가한 날 천곡사를 찾아가니
풀 속에 겨우 길이 있었네
누각이 높았으니 바람 얻기 쉬웠으나
산이 바로 닿아 달 보기가 어렵구나
계곡의 새들은 어지럽게 울어대고
감실(불상을 안치한 곳) 덮은 구름은 서기가 빛나도다
무지한 시골의 아낙네들
부처님께 빌며 인도환생 바랐다네
五宜亭이 며칠 동안 홀로 노닐다가 온 것을 五言句로 읊은 평범한 시라고 짐작된다.
천곡사를 신광현에서 간다면 우각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예부터 우각마을 사람들이 절 행사나 산수 구경하러 가는 경우가 간간이 있을 정도이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천곡사를 찾아가는 길이 풀 속에 있었다는 것, 높은 절 누각에 바람이 있다는 것, 산에 가리어 밤에 달을 보기 어렵다는 것, 계곡에는 뭇 새들이 별난 소리로 우는 것, 무지한 시골 아낙네들이 부처님께 인도환생하기 위해 비는 것 등이 하나의 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를 단적으로 말하면 홀로 한 사찰을 관람한 여정 가운데서 보고 느낀 것을 다소 수식하여 하나의 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12. 兄江舟中(형산강 배 안에서)
運晉康天水渺茫
扁舟泛泛興顚狂
唱羅櫂歌詩更和
不知紅旭上扶桑
강 하늘에 구름 걷혀 강물만이 아득한데
조각배 둥실둥실 마실 듯이 흥겨웠네
뱃노래 그친 뒤에 시를 다시 화답하며
저 멀리 동해 위에 해 뜨는 것 몰랐다네
五宜亭이 친구들과 함께 형산강 배 안에서 매우 흥겹게 놀았던 것을 시로 나타낸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강물이 아득한데 조각배 “둥싯 둥싯”(배 따위가 굼뜨게 떠다니는 모양) 미친 듯이 흥겨웠다.
뱃노래 뒤 시로 화답하면서 끝없이 밤에 놀았기에 해 뜨는 것 몰랐다는 것이다.
이 시를 몇 번 읊어보니 즐겁게 노는 장면들이 뇌리에 떠오르는 것 같다.
~이경섭 외 2인 공동연구, 「오의정 이의택의 생애와 업적연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