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문구 외길

나의 문구 이야기

by 다은

문구점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아기자기한 문구점에 가보라는 지인의 추천에 내가 운영하고 있는 매장을 찾아온 친구는 곳곳에 쓰여있는 익숙한 글씨체를 보며 문득 학창 시절의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늘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는 게시판에 적혀있는 대표자의 성함을 보게 되었고, 때마침 문구점으로 출근한 나와 마주한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일드에 빠져서 혼자 독학으로 여름방학 동안 일본어 자격증 중 가장 높은 급수를 단번에 취득했던 나의 옛 친구는 그 사이 일본어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그녀의 반듯한 삶에 대한 감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친구는 되려 내게 말했다. “너야말로 늘 아기자기한 문구를 좋아하고, 그렇게 그림을 그리더니! 결국 좋아하던 문구를 만드는 일을 하네? 이 정도면 문구 외길 아니야?”


인생은 곡선 같지만,

멀리서 보면 직선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돌고 돌아온 것 같았는데 살면서 찍었던

수많은 점들이 나를 어딘가로 인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점들을 돌아보면 내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 내 마음에 와닿았던 모든 만남들이 의미 있게 남는다.


내 나이 서른둘, ‘외길’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사전적 언어를 찾아보니 ‘한 가지 방법이나 방향에만 전념하는 태도. 단 한 군데로만 난 길.’을 의미할 뿐, 어떤 연륜과 적정 기간이 적혀있지는 않았다. 돌아보니 '문구로 이루어진 나의 점선’은 "오! 이 정도면 문구 외길이군!”이라고 답하는 듯하다.


이제부터 전할 이야기에는 매뉴얼은 없고, 오로지 나와 문구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나의 문구 외길은 가까운 동네 문방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편지지만 200여 종을 모았고, 당시 그 편지지는 소중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두툼한 클리어 파일에 편지지를 수북이 보관하고, 사물함에 파일을 쌓아두었다. 매일 2~3통의 편지를 보내고는 했는데, 편지를 받는 이는 친해지고 싶은 친구도 있었지만, 오해를 풀고 싶은 사이에도 편지를 보냈다. 전학 온 친구도 내 편지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웰컴 편지를 보냈다.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과는 매일 편지를 나누었다. 등교를 하면, 나의 책상 서랍에 전날 선생님이 넣어둔 편지가 있었고, 당시 학교생활을 하며 나의 루틴은 그 편지를 읽으며 시작되었다. 하교를 할 때에는 교무실에 들러서 선생님 책상 위에 오늘의 편지를 놓고 갔다. 빼빼로데이와 같은 기념일에는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에게도 교감선생님과 경비아저씨에게도 편지와 빼빼로를 전했다. 왠지 학교에서 편지를 못 받아봤을 것 같은 대상이라서 쓰기 시작했는데 받는 이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편지와 빼빼로를 들고 현관문 앞에 서 있으면, 다른 분께 주려는 줄 알고 문을 열고 들어가라며 휘휘 손짓을 하시다가, 받는 이가 본인이라는 나의 이야기에 “어? 정말 나한테 주는 거야?”라며 두세 번은 더 되물어 보시고는 했다.


그 시절, 편지 외에도 문구라면 관심이 많았다. 필기구는 사용할 수 있는 필통과 관상용 필통을 따로 구비해 두었는데, 필통이 갈수록 뚱뚱하고 묵직해지는 모양새가 웃겼다.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었지만, 노트 필기에는 관심이 많아 매 수업시간마다 열을 올렸다. 잘 정리된 교과서는 매 학기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찾아와서 교과서를 줄 수 있는지 의사를 물어보셨고, 그렇게 내게 남은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게 되었지만 학창 시절 특별한 에피소드로 남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 영미, 수진이와 함께 쓴 교환일기장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기록의 재미도 알게 되었다. 교환일기, 러브장, 비밀일기, 롤링페이퍼와 같은 기록은 반복되는 학교 생활에 특별한 즐거움이 돼주었다. 학년마다 미화부를 맡게 되었고, 학급회의 시간에는 서기도 맡으며 매일매일 학급일지를 쓰는 임무는 아무 보상도 없었지만, 내게는 중요하고 비장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입시 미술을 배웠다. 미술학원에서는 그림을 배우기 전,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부터 배울 수 있었는데 각각의 도구들은 그 쓰임새가 달라서 새로운 사용법을 알게 될 때마다 새로운 능력치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에 붙자마자 첫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주어진 업무는 종이와 잉크냄새로 진동하는 인쇄소에서 보조로서 임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다량의 종이를 단 번에 정리하는 방법, 종이의 결을 알아보는 방법, 인쇄기기를 작동하는 방법, 떡제본하는 방법, 이미 제본된 책의 표지를 교체하는 방법, 등 모든 일이 흥미롭게 골치 아팠다. 종이를 다루는 일이다 보니 종이에 손을 베는 일도 종종 생겼다. 약 80g 정도의 얇은 종이에 피부가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그 아픔보다 놀라움이 컸다. 내가 다닌 인쇄소에서는 다양한 기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인쇄기의 성능이 남달라 2분 만에 두터운 책 한 권이 뚝 딱 뚝 딱! 만들어졌다. 한 번은 간지를 오계산해서 버튼을 잘못 눌렀다가! 순식간에 2,000장의 종이가 5권의 잘못된 책으로 만들어졌을 땐 현기증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순식간에 2,000장의 종이를 버리게 되다니!"


그 이후, 그 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내 인생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본래 첫 번째에 비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숫자이지만 두 번째 역시 문구와 밀접한 일터라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경험이었다. 두 번째 일터는 프랜차이즈 팬시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문구스러운 시작이 아닐 수 없다.


팬시점에서는 파트별로 물품이 어디에 있는지 천장에 쓰여있는 번호표대로 부지런히 익혀야 했다. 그리고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천 필통은 매대에서 탈출을 성공한 듯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것들을 쏙쏙 빠진 매대로 정돈해야 했다. 언젠가부터 구석구석 숨어있는 문구가 눈에 훤해졌고, 손님들을 보며 다양하면서도 어쩐지 한결같은 취향이 보였다. 퇴근 후에는 손님의 시선으로 문구점을 둘러보며 쇼핑도 많이 했다. 그 이후에는 미술학원 강사, 벽화 아르바이트, 보안요원, 레스토랑, 안내데스크, 물리치료 보조, 카페 아르바이트 등 문구와는 영 거리가 먼 다양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이 외의 업무에서도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 넓게 볼 수 있었다.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고,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친구들과 12월에 중순에 열리는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 갔다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구 에이전시를 만났다. 그 이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대학교 2학년때에는 본격적으로 각 문구브랜드마다 메일을 보냈다. 어떻게 해야 "문구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지, 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부터 무얼 준비하면 되는지? 등등 10군데를 보내면 8군데에서는 답변을 보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당돌한 질문들도 많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답변을 받은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대학시절, 직접 만든 굿즈를 학교 축제때 선보였다.


대학교 3학년때에는 친구들과 굿즈를 만들어 학교 축제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축제 때마다 주로 주점만을 운영했고, 나의 로망이었던 미대다운 축제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 2학년이 되기까지 “나의 로망을 이뤄줄 선배가 어디 없나? ”하고 애타게 찾아다니다가 결국 3학년이 되어버렸다. 3학년이란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은 시기이기에, 나의 로망을 스스로 선배가 되어 이루게 되었다. 물론, 직접 만들어서 판매한 굿즈는 교내에서 처음이었던 만큼 반응이 좋았고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 즐거움에 옆 학교 축제에까지 참가해 굿즈를 판매했고, 남은 재고와 함께 새로운 굿즈를 추가로 만들어서 여름방학 때에는 친구들과 록페스티벌에서 진행하는 마켓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문구 에이전시에 채용공고가 올라왔다. 면접 당일 그간의 작업과 함께 내가 만들어서 사용하던 다이어리를 들고 갔다. 그동안의 나의 문구 이야기를 전했고, 면접자리에서 합격했다. 꿈에 그리던 회사에서 문구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흔히 알고 있던 문구 브랜드와는 달리 문구 에이전시에서는 주로 기업 외주, 엔터테인먼트 굿즈 작업을 해야 했다. 입사한 지 5일 만에 3가지 상품을 출시하게 되었고, 7일 차에 돌연 퇴사를 했다. 하루 20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 있었고, 5일 동안 잠을 도통 잘 수 없었다. 하고 많던 열정도 7일 만에 모든 것을 태우고 나서야 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8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 반까지 일을 했는데 눈을 감아도 모니터 화면이 보일 지경이었다. 회사 대표는 퇴근 시간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부여했고, 그렇게 건네받은 프로젝트에 대한 디자인 작업을 대표자의 책상에 보고서로 올리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퇴근을 할 수 없었다. 사내에서는 ‘하루라도 일찍 그만두는 사람이 지혜롭다.'라는 말이 돌았다. 그도 그럴게 수면시간이 적으니 하루가 지날수록 판단력이 점점 흐려져서 퇴사를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아픈 광경은 처음 봤던 것 같다. 입사하던 첫날, 이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다짐이 출근을 할 때마다 하루에 1년씩 줄어들었다. “3년은 일해야지.” 했던 마음이 이틀차에는 “그래도 2년은 일해보자.”로 바뀌었고, 3일 차에는 “1년만 버텨보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내에서 가장 오래 일한 주임님의 별명은 ‘소울리스’였다. 그녀의 눈은 이미 총기를 잃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2년 전에 총기가 있기는 했을까? 싶을 정도로 탁한 눈동자를 가진 분이었다. 아무튼 그 눈동자와 마주 보고 있으면 “주임님처럼 되지 말아야지.”하는 기준이 생겼다. 일을 마치고, 주말에 고향 대전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밥을 먹다가 앉은 채로 잠에 들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을 끔뻑 떠보니, 어머니가 나를 보며 울고 계셨다. 이후, 사람처럼 살지 못한다면 디자이너가 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고속 퇴사를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데 나와 같은 상황에 있던 친구로부터 대학교를 다니며 함께 만들던 굿즈를 하반기까지만 더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것이 문구 브랜드, ‘프렐류드(Prelude)’의 시작이었다.


2015년에 런칭한 문구 브랜드, 프렐류드(Prelude)는 8주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