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서울.
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각, 중소기업 인포넥스 사무실 건물 7층 창문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깔린 도심 속에서, 유독 그 창문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회사를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또 야근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으리라.
김현우(55세)는 공공 SI(시스템 통합) 사업을 주로 수행하는 이 회사에서 ‘이사’ 직함을 달고 있었지만, 실상은 직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고달픈 야근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안서 작성, 영업 미팅, 고객 응대, 수행 계획서와 착수 보고서 작성 등 프리세일즈와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업무가 뒤엉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사업 특성상 정부부처나 공공기관에서 말 한마디만 던지면 그 즉시 모든 일정을 갈아엎어야 했다.
“하아… 이거 몇 번째 밤샘이야.”
책상 위에는 계약서, 추가 요구사항 문서, 개발 보고서가 뒤엉켜 있었다. 커피 찌꺼기가 잔뜩 눌어붙은 종이컵이 책상 구석마다 흩어져 있고, 아침부터 허겁지겁 끼니를 해결했던 컵라면 용기도 굴러다녔다.
공공기관 프로젝트는 한두 번 겪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고, 부처 장관이 교체되면 갑자기 사업의 방향이 뒤집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은 을(乙)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무리한 일정과 추가 기능을 ‘당연히’ 수용해야 했다. 그게 싫어도 사업을 놓치면 회사가 휘청거렸다.
김현우는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미 사람보다 문서와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25년 넘게 이 업계를 경험했고, 수없이 많은 정부 프로젝트와 갑질을 감내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맥박은 빠르게 뛰었으며 호흡이 가빴다. 목이 타는 듯하여 물병을 찾으려 몸을 돌리는 찰나, 두 다리가 휘청거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이사님! 이사님, 괜찮으세요?”
근처에서 코딩하던 직원이 달려왔지만, 김현우는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없이 가라앉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직전 머릿속에 스쳐간 건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회사 동료들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회사는 어떻게 되고, 가족은 또…’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 그는 어떤 캄캄한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김현우."
"김현우."
"김현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망토를 입은 사신이었다. 싸늘한 공간에서 사신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넌 25년 동안 수많은 갑질과 정권 교체의 희생양이 되었지. 원래 네 운명은..."
그 말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김현우의 시야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김현우는 익숙한 사무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뻐근한 목과 어깨, 그리고 손에 쥔 펜. 머리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건 서류더미였다. 공공사업 제안요청서 초안, 사업 수행 계획서, 고객 응대 내역 메모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사무실?”
창밖에는 해가 떠 있었고, 달력은 2015년 1월 1일. 폴더폰을 열자 화면에 뜨는 날짜도 동일했다.
“2015년…? 말도 안 돼…”
어지러운 머릿속은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쓰러지던 순간, 사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 어둠. 그런데 지금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분명 현실이었고, 몸은 분명히 젊었다. 하지만 감정은 뒤엉켰다.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너무 생생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보통 회귀물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던가, 학생 때부터 시작하잖아… 근데 왜 하필 10년 전이지?' 김현우는 스스로 중얼이며 고개를 저었다. 인생의 갈림길도 아니고, 이미 한참 사회생활에 찌든 시점 아닌가. '이게 무슨 의미지? 왜 지금이지…?' 혼란은 점점 깊어졌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꿈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떨렸다. 의심과 혼란, 두려움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득 스친 얼굴. 아내, 그리고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딸. 아직 이혼하기 전이었다. 아직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며, 동시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자신이 무심하게 흘려보낸 소중한 것들. 이제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 지금부터다.”
김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혼란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이 기회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보다, 이 상황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눈앞에 쌓인 현실부터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본능처럼 컴퓨터를 켜고 아웃룩을 열었다. 워커홀릭처럼 살아온 지난 습관 때문일까, 무의식적으로 업무 캘린더를 확인했다. 일정에는 빼곡하게 회의 일정, 고객 미팅, 제안서 제출 마감일, 내부 보고 일정 등이 적혀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이미 잊고 있었던 업무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곧 하나의 업무 항목에 고정되었다. [공작기계 전문기업 웹사이트 리뉴얼 착수 미팅] — 이 프로젝트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지연되고 있던 작업이었다. 단순한 홈페이지 개편이 아니라, 기업 이미지 제고와 함께 제품 정보 관리 시스템을 연동해야 하는 복잡한 일이었다. 고객은 까다롭고, 내부 리소스는 부족했다. 과거엔 이 업무를 그저 넘기기 바빴지만, 지금은 달랐다.
“좋아, 이거부터 제대로 정리하자.”
김현우는 펜을 들어 회의 준비 체크리스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객사의 니즈를 다시 분석하고, UX/UI 개선안 구상, 콘텐츠 리소스 정비 계획, 기술 검토 사항 등을 메모에 적었다. 이 프로젝트는 과거에 수주에 실패했던 기억이 있었다. 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한 디자인 개편 수준으로 접근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앞으로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디지털 트렌드, UX 전략, 검색 최적화, 반응형 웹의 중요성 등등 그가 이미 경험해본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바로 지금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쌓인 업무, 반복되는 구조적 비효율. 이 작은 것부터 바꾸지 않으면, 다시 무너질 것이다.
김현우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두 번째 인생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