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이라는 간신배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성 안에서부터
천천히 경계를 허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런 경계를 허물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성주(城主)의 손에 작은 성취들을
쥐여주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게 격파되지 않을 수준의
군대를 연속적으로 보내면,
승리에 취한 성주는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그 순간부터 견고한 성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된다.
부러져 가는 무기들을 정비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화살통의 화살은 조금씩 비어 간다.
적의 본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여러 방면에서 보내는 경고를
그저 가벼운 신호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늘 그래왔듯 승리는
자기 손에 들어올 거라는
맹목적인 착각 때문이다.
결국 적의 본대를 맞이한 성주는
불타는 성과 백성들을 뒤로한 채,
적의 수장 앞에서 비참히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시원하게 비가 내리던 오후,
경쾌한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렸다.
"귀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가벼운 미소를 짓고 휴대폰을 덮은 뒤
다시 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충분히 기분 좋은 상황이었지만,
당시 덤덤하게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그간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뭔가 해봄으로써 두 번 이상의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큰 도전에서도 혼자만
통과하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굳이 실패를 피하려 애쓰지 않았음에도,
의도치 않게 나는 실패에
무던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작은 실패들 없이 자라온 나에게
'하면 된다'라는
단순한 말은 곧 내 철학이자
제1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부끄럽지만, 내가 한 번에 해낸 일들을
다른 친구들이
여러 번의 도전 끝에도 해내지 못할 때,
겉으로는 공감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오만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얻은 결과들을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서서히 자만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문제가 없다고 착각했다.
휴식을 핑계로 일주일 단위로
무의미하게 보내는 하루가 늘어갔고,
그것은 지난날의 노력이 무참히
무너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눈에 띄게 살이 찌고 생각은 단순해졌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오늘 어떻게
놀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분명 어딘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은 승리에 취해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보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전과의 차이는 명확했다.
과거의 나는 부족한 상황을 알고
치열하게 노력했으나,
난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은 단계에 와 있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다 되는 줄만 알았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 나는 본래 목적이었던 목표를 앞에 두고
작은 성공에 취해 근본을 무시한 대가는
목표치 근처도 가지 못한 채
큰 패배감을 맛보았다.
다행히도 우린 지킬 성이나 백성이 없다.
하지만 자만이라는 '간신배'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때가 되면 언제든지 튀어나와
세상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버린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내면에 있는 자만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런 패배감을 토대로
자신감은 가지되 자만은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