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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식 Apr 10. 2020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그거 아닌데요

그말 좀 그만하세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기원이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저 작자미상의 격언(?)이 가장 흥한 나라는 한국일 거다. 민주주의 국가 중 저 말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진보든 보수든 어떤 세력이 분열로 망하려면 분열된 표가 사표가 되는 선거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은 대표적으로 그런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다.


이해타산에 의해 쉽게 뭉치는 보수와 달리 가치지향이 강한 진보진영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분열하는 것이 필연이다. 분열된 표 = 사표가 되는 선거에서 분열은 자연스럽게 패배의 원흉이 된다. 이런 정치문화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불협화음이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치러지는 모든 공직선거는 사표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양당 구도에서 3등 이하가 받은 표는 그게 몇표가 되든 가치가 0에 수렴되는 마법. 1등이나 2등과 연합하지 않으면 죽은 표가 되는 현실에서 3등 이하의 목소리는 설 곳이 없다.


올해초 국회는 이 고질적 병폐를 치료하고자 선거제도를 일부 개정했다. 그런데 사표방지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위성정당이 만들어졌고, 진보진영(?)은 또 다시 분열이 지탄받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분열을 승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또 다시 분열을 죄악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열이 죄악이 될 때 그 압력은 온전히 소수파에 쏠린다. 얼마 전까지 소수정당들에게 선거용 연합정당에 들어오라 압박하던 큰 당 사람들은 이제 소수당 지역구 후보에게 사퇴 압력을 쏟아낸다. 언제나처럼 다수파는 소수파를 향해 왜 분열하냐고 윽박지르고, 소수파는 또다시 내 표가 사표가 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진다. 


선거 직전 분열을 억압해 물리적 결합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대증요법이다. 정치문화가 여기 길들여질수록 소수의 목소리는 실종되고 공동체는 경직되며 다양성은 억압된다. 그것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한국정치다.


소수정당들 앞에는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다. 하나는 분열을 포기하는 정략적 타협의 길이고, 하나는 제 목소리를 지켜내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는 거짓 프레임에 맞서는 길이다. 


말을 고쳐 써야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허락하지 않는 제도와 그것을 승인하는 정치문화에 말라 죽는다. 이 간단한 매커니즘을 깨지 못하는 이상 진보진영은 사표론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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