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바람 Nov 21. 2024

엄마 가슴에 붙은 검은색 테이프

생애 첫 기억 |

내 생애 첫 기억은 4살 때의 일이다.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가장 또렷이 남은 세 장면이 있다. 마루에 앉은 엄마 옆으로 옆집 아주머니가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엄마의 젖꼭지에 검은색 테이프(전기 전열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그건 동생의 젖을 떼는 일이었다. 4살짜리가 뭘 알았을까. 나이 들면서 그때의 검은색 테이프가 종종 생각나곤 했다. 그때의 나를 상상하면 엄마의 젖을 물 때마다 동생은 승리자였을 거라 생각했을 거 같다. 하지만 그날, 검은 테이프가 붙여지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 것일 테다.  동생도 이제 더는 엄마의 품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안도감, 그리고 곧이어 밀려오는 죄책감. 어쩌면 나도 저렇게 거부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동생이 안쓰럽기도 한 감정이 무의식 안에 똬리를 틀었지 않았을까?


여섯 살 때였다. 엄마가 "우리 막둥이~ 강아지~" 하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날, 나는 한참을 엄마의 무릎을 파고들었다. 엄마의 관심을 받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을 기다렸다. 2남 1녀 중 중간에 낀 나에게 엄마는 "오빠에게는 대들면 안 된다" "동생에게는 양보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셨다. 그럴 때마다 억울했다. 오빠가 나에게 양보하지 않을 때는, 동생이 나에게 대들 때는 왜 모른 척하시는지. 엄마의 불공평한 잣대가 서운했다. 그래서 더 심술궂게 굴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를 엄마가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반항했고, 그럴수록 더 거부당한 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유년기의 기억은 내 관계 맺기 방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첫사랑이 결혼을 이야기했을 때, 소울메이트라 여겼던 언니가 내 잘못을 지적했을 때, 관계가 깊어지는 데 필요한 통과의례 같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는 도망쳤다. 거부당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엄마 앞에서 술에 취해 울었던 적이 있다. "왜 나만 차별했어요?" 소리치며 원망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난 공평했다"고만했다. 냉정한 판사 같은 엄마. 둑이 한 번 터지면 두 번 터지는 건 일도 아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쓰며 엄마라는 한 여자의 삶을 들여다보니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80년대 흑백 TV 시절, 연탄불 때고 곤로로 밥 해 먹던 시절, 차가운 물에 손빨래하며 세 아이의 기저귀를 빨았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몇 년 전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사과했다. "형제 사이에 중간에 낀 애들은 드세데. 살려고."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우리는 화해했다. 내가 엄마에게 그토록 반항했던 건 그만큼 엄마를 사랑해서였다는 걸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연로하신 엄마를 딸처럼 돌보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관계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바로 관계를 끊지 않는다. 갈등이 생기면 대화로 풀어본다. 나를 다그치지 않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오늘도 엄마는 잔소리를 하신다. "전기불 한쪽은 꺼라." 예전 같았으면 피하기 바빴을 텐데, 이제는 그 잔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듣는다. "나 혼자 산다"의 코쿤이 말했다. 잔소리를 "사랑해"라고 바꿔서 들으면 된다고. 그래서 한 번은 물은 적이 있다. "잔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걱정이 되니까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야?"


"사랑은 앰뱅, 잔소리다!"


그 말에 하하 웃고 냉정한 판사가 아니라 츤데레 같은 엄마의 성정을 진즉에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마음 한편에 검은 테이프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이제 그 의미가 조금은 달라졌다. 그 기억은 더는 도망칠 이유가 아닌, 나를 이해하고 타인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AI를 활용해 창작하는 작가의 환경 살리기 운동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