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로 들어갈 때 챙겨간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나만큼이나 기세등등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보며 오늘 회의에서 내놓을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빛을 발할지 상상한다. 하지만 논의가 길어지고 반박이 오갈수록 커피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내 열정이 상대의 현실적인 비판에 부딪혀 식어가는 속도와 커피가 식어가는 속도는 묘하게 닮아 있다.
결국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씁쓸하다 못해 서글프다. 본래의 향은 사라지고 산미만 강조된 식은 커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변질된 내 기획안을 닮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식어버린 액체를 끝까지 마셔야 한다. 그것이 이 자리를 지키는 자의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차가워진 컵을 만지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온도는 내려갔을지언정 본질은 여전히 커피다.
오전 내내 휘몰아친 업무가 잠잠해질 무렵, 식어버린 잔을 비우고 다시 탕비실로 향한다. 이때의 커피는 '모닝'이라기보다 '리필'에 가깝다.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과정이다. 텅 빈 컵을 씻으며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무심하게 푸르다. 뜨거웠던 열정을 식히고 이제는 냉정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할 시간임을 식은 커피가 알려준다.
가끔은 동료의 책상 위에 놓인 식어버린 커피 잔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아, 저 사람도 나만큼이나 치열한 오전을 보냈구나.'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동지애다. 우리는 서로의 식은 커피를 보며 웃음 한 조각을 나눈다. "커피 다 식었네요. 새로 한 잔 하실래요?"라는 말은 사무실에서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다. 커피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조절한다.
오후가 되면 오전의 치열함은 어느덧 일상이 된다. 식은 커피를 버리고 새 컵을 준비하듯, 실패한 기획안을 수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모닝커피의 뜨거움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던 기억은 다음 번엔 끝까지 따뜻하게 마실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가장 뜨거운 커피를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