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세련된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탕비실 구석에 놓인 노란색 믹스커피 봉지에 손이 간다. 특히 비가 오거나 월요일 아침처럼 몸이 천근만근일 때 그렇다. 설탕과 프림의 완벽한 조화가 선사하는 즉각적인 당분은 복잡한 세상사를 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 촌스러운 노란색은 세련됨을 강요받는 직장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불량한 휴식'이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가득 채우면 안 된다. 딱 절반, 그 찰랑거리는 높이가 가장 맛있다. 그 적은 양이 주는 만족감은 의외로 크다.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그 적절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고참 사원들의 숨겨진 기술이기도 하다. 인생도 이 믹스커피처럼 적당한 타협과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이컵 속의 소용돌이를 보며 배운다.
"박 대리, 커피 한 잔 할까?" 부장님의 이 한마디는 대개 믹스커피 타임을 의미한다. 세련된 카페에 갈 여유는 없지만,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 믹스커피는 최고의 안주가 된다.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시는 달콤한 액체는 경직된 위계질서를 잠시나마 부드럽게 녹여준다. 그 순간만큼은 부하 직원과 상사가 아닌, 고단한 하루를 나누는 인간 대 인간이 된다.
믹스커피 향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식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웠던 아버지의 뒷모습, 살림의 고단함을 커피 한 잔으로 달래던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는 나는 어느덧 부모님만큼 자라 그분들이 견뎠던 무게를 감내하고 있다. 이 달콤함은 단순히 입 안의 즐거움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생존의 맛이다.
커피 봉지로 컵을 젓는 행위는 위생상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그 투박한 몸짓이야말로 직장인의 생동감을 상징한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커피 물처럼 우리네 삶도 쉼 없이 돌아간다. 설탕 입자가 다 녹아 없어지듯, 오늘 아침의 짜증과 피로도 이 한 잔에 녹여 보낸다.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질 때, 비로소 진짜 오전 업무를 시작할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