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백 하나에 담긴 퇴사의 맛

by 숫자의언어

오후 네 시의 도망치고 싶은 유혹

오후 4시는 위험한 시간이다. 점심 식사의 기운은 이미 다 빠져나갔고, 퇴근 시간은 아직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시간. 모니터 속 글자들은 춤을 추고 마우스 클릭 소리는 환청처럼 들릴 때, 발길은 자연스럽게 탕비실로 향한다. 이곳은 업무라는 감옥에서 허락된 유일한 '면회실'이다. 서랍장에 가지런히 놓인 다양한 종류의 티백들을 보며 고민에 빠진다. 오늘은 날카로운 녹차의 맛일까, 아니면 이 상황을 잊게 해줄 달콤한 둥굴레차의 맛일까.

우려내는 시간 동안의 명상

티백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마른 잎들이 서서히 퍼지며 수색이 변한다.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3분이라는 시간은 회사 생활에서 가장 정직한 시간이다. 누구도 이 과정을 재촉할 수 없고, 건너뛸 수도 없다. 그 3분 동안 나는 창밖을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채용 공고를 뒤적거린다. "지금 그만두면 퇴직금이 얼마더라"는 계산기를 머릿속으로 두드리며, 티백이 뿜어내는 향기에 퇴사의 욕구를 살며시 녹여낸다. 차가 진해질수록 나의 인내심도 함께 우러난다.

상사와의 티타임이라는 고문

가끔 탕비실은 고문실로 변하기도 한다. "자네, 잠깐 차 한잔할까?"라는 상사의 제안은 결코 차 맛을 즐기자는 뜻이 아니다. 좁은 공간에서 어색하게 차를 마시며 이어지는 훈계와 잔소리는 차가운 얼음물보다 더 목을 메게 한다. 탕비실의 소음 차단 효과는 미미해서, 밖에서 들릴까 봐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상황은 비참함을 더한다. 그럴 때 티백 속의 찻잎은 내 마음처럼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것만 같다.

동료와 나누는 은밀한 위로의 티백

하지만 탕비실은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업무 실수로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고 나온 후배에게 건네는 따뜻한 캐모마일 한 잔은 백 마디 말보다 힘이 세다. "힘들지? 좀 쉬었다 해"라는 짧은 인사가 찻김과 함께 피어오를 때, 퇴사를 결심했던 마음은 조금씩 사그라든다. 우리가 회사를 버틸 수 있는 건 대단한 비전이나 연봉 때문이 아니라, 탕비실에서 티백 하나를 나눠 가지며 공감해 주는 동료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찻잔을 비우고 돌아가는 길

차를 다 마시고 티백을 건져 올려 쓰레기통에 버린다. 찻잎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고 하얗게 변한 티백의 모습이 꼭 나의 퇴근 전 모습 같다. 그래도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남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갈 힘을 준다. 오늘 마신 차는 퇴사의 맛이었을까, 아니면 잔류의 맛이었을까.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의 '버티는 맛'이었을 것이다. 내일도 나는 이 탕비실에 들러 티백 하나를 고를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인내심을 우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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