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어버린 곳

by 숫자의언어

회사에 들어온 지 몇 해가 지나자 이상한 감각이 생겼다. 분명 매달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는데, 내가 이 조직 안에서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익숙해졌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업무는 능숙해졌고, 보고서는 빨라졌으며, 회의에서 어떤 말을 해야 무난한지도 알게 됐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끝에 남은 건 성장보다는 마모에 가까웠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나는 분명 나만의 색이 있었다. 일에 대한 기준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조직은 그 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직이 원하는 건 튀지 않음, 예측 가능함, 관리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다듬어졌다. 말의 각은 둥글어졌고, 질문은 줄었으며, 불편한 진실은 마음속에서만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회사에서의 평가는 늘 결과 중심이다. 과정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밤을 새웠는지,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는 보고서 한 줄로 압축된다. “잘 처리했습니다.”라는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그 말이 반복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허전해진다. 잘했다는 말이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은 사람을 키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듬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감정과 생각은 깎아내고, 규격에 맞지 않는 태도는 교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쉽게 대체 가능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게 된다. 너무 잘해도 부담이고, 너무 솔직해도 위험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가장 피곤한 건 일이 아니라 ‘관계 속의 나’를 관리하는 일이다. 상사의 기분을 읽고, 팀의 분위기를 맞추고, 말 한마디를 보내기 전 몇 번이나 고쳐 쓰는 과정. 업무는 퇴근하면 끝나지만, 관계는 그렇지 않다. 집에 와서도 낮에 했던 말을 곱씹고, 하지 말았어야 할 표정을 떠올린다. 그래서 직장생활은 조용히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도 출근한다. 생계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아직은 이곳 말고 다른 선택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다듬어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라지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닳아버리지는 않을 수 있다.


조직 안에서의 나는 역할일 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회사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자주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직장생활을 버텨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조직에 속해 있지만, 조직 그 자체는 아니다. 다듬어지되, 지워지지는 말아야 한다. 그 경계를 지키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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