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초반에는 조직이 나를 성장시켜 줄 거라 믿었다. 선배의 조언, 교육 자료, 평가 제도까지 모두 ‘사람을 키우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회사는 학교보다 더 체계적이고, 더 실전적인 배움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조직은 사람을 키우기보다는, 조직에 맞게 다듬는 곳이라는 사실을.
조직이 원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맞는 사람이다. 질문이 많은 사람보다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사람보다 기존 방식을 무리 없이 유지하는 사람이 더 편하다. 그래서 조직은 가능성을 확장시키기보다, 튀어나온 모서리를 하나씩 깎는다. 말투를 고치고, 속도를 조절하고, 감정을 숨기는 법을 가르친다. 그 과정은 교육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실제로는 적응 훈련에 가깝다.
처음엔 그 다듬어짐이 성장처럼 느껴진다. 예전보다 보고가 빨라지고, 눈치가 생기고, 회의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실수도 줄어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덜 드러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능력이 늘어난 건지, 아니면 스스로를 숨기는 기술만 늘어난 건지 구분이 어려워진다.
조직은 효율을 중시한다. 효율은 사람을 단순화한다. 복잡한 생각, 개인의 고민, 각자의 속도는 비효율이 된다. 그래서 조직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니?” 질문의 방향이 다르다. 전자는 성장의 질문이고, 후자는 사용의 질문이다.
평가 시즌이 되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평가표에는 숫자가 있고, 항목이 있다. 거기엔 태도, 협업, 성과 같은 단어가 적혀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고민의 깊이나 버텨낸 시간은 적히지 않는다. 조직은 결과만 본다. 그 결과를 위해 사람이 얼마나 흔들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은 척 해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지친다. 크게 실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성장한 느낌도 없다. 그저 매년 조금씩 더 매끄러워진다. 말은 둥글어지고, 표정은 관리되고, 생각은 속으로만 접는다.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을수록, 나라는 사람은 점점 정리된 파일처럼 변해 간다. 불필요한 감정은 삭제되고, 튀는 의견은 숨김 처리된다.
물론 조직이 모두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조직이 없었다면 배울 수 없었던 것도 분명히 있다. 일의 구조, 책임의 무게, 협업의 현실 같은 것들은 조직 안에서만 배울 수 있다. 다만 그 배움은 사람을 키운다기보다, 역할에 맞게 정렬시킨다. 키우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듬는 일은 빠르다. 조직은 빠른 쪽을 선택한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다듬어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자라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 조직은 너무 편해지고 나는 너무 작아진다. 조직에 잘 맞는 사람이 되는 대신, 나에게 맞는 삶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다듬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스스로를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조직은 나를 완성해 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어디까지 깎일 수 있는지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퇴근길에 생각한다.
나는 오늘 얼마나 더 정리되었을까.
그리고 그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