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work)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예술직이나 연구직처럼, 일은 좋아서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삶은 행복하다. 그래서 평생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을 하고 있다. 혼자 혹은 팀을 이루어, 정해진 시간내에 나머지 플레이어와 총격전을 벌이며 살아 남으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면 “치킨을 먹는다“라고도 표현한다.
게임의 부가적인 효용 중에는 “수다”도 있다. 팀으로 하는 경우 같은 한국사람끼리라면, 음성 채팅으로 아주 가끔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2-3년전 쯤에, 나를 포함한 4명의 팀원이 전원 한국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전투 중에 잡다한 주제로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내가 “나는 죽기 전날까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기가 식는 싸늘함은 음성 마이크를 넘어서까지도 전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들 잠시 동안의 침묵…, 다들 자신들과는 정반대의 있을 수 없는 생각의 소유자를 만난 듯한 반응이었다. “일중독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데, 난 한 번도 내가 일중독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난 주,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발제자는 나머지 참여자들에게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일이 기뻤을 때, 일이 슬펐을 때에 대한 경험을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나는 일은 항상 기쁘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했고, 일이 없을 때야말로 슬플 때라고 했다. 발제자는 정말 경이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미지의 생물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나는 대체, 왜 그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 지 아직도 모른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경이로운 눈빛도 괜찮았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
책에서 답을 찾아 본다. 도서 “그냥 하지 말라”(송길영)에서는 사장들의 오해가 나온다. 저자가 지적한 사실인데, 사장이나 임원들은 일을 좋아해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다. 본인들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직원들도 일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일을 안하는 직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일이 싫다면 왜 그 일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것일까! 싫어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가 선택해서 하고 있다?’ 이런 물음은 내 머리 속에서 성립될 수 없는 전제다.
다만, 내 가치관이 내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예술과 같이, 연구나 창업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한다. 내가 본 모든 연구자들, 모든 창업가들은 자기 일(work)을 좋아했다. 그래서 다들 좋아서 자기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카데미아(academia)를 나오고, 일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신선하기는 한데,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객관화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내가 현재 다수에 속하는 사람인지, 소수에 속하는 사람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아카데미아(academia)에서는 분명 절대 다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근로자의 세계에서는 절대 소수인가? 그런데 나는 근로자가 아니다. 1인이지만 기업가(entrepreneur)다. 창업스쿨이나 육성사업 동기들을 만나면, 모두 본인들이 좋아하는 일(사업)을 하고 있다. 성과(수익)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이지, 본인들이 선택한 아이템은 자기들이 좋아서 선택했다. 주위에서 돈 안 될 것 같으니, 다른 사업을 하라고 해도 다들 고집스럽게 자기 사업을 한다. 또 근로자들 중에서,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무지 많을 것 같은데, 왜 ‘평생 일하고 싶다’는 내 의견에 경이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