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부모가 이렇게 물었다.
“아이와 관계가 좋고, 부모도 아이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는 상태라면
아이도 공부를 잘하게 될까요?”
많은 부모가 기대하는 답은 이거다.
행복 → 자존감 상승 → 성적 상승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누가 더 오래, 더 깊게, 더 반복하느냐의 문제다. 인지심리학에서 학업 성취를 가장 강하게 예측하는 변수는 재능이 아니라 **의도적 연습(deliberate practice)**과 투입 시간이다.
행복이 문제집을 대신 풀어주지는 않는다. 충만하다고 수능 등급이 자동으로 오르지 않는다.
이건 냉정한 구조다.
여기서 과학이 들어온다.
만성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을 높이고 이는 해마 기능을 저하시켜 기억 형성을 방해한다. 지속적인 불안과 압박은 학습 효율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행복하면 잘하겠네?”
아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높으면 망가진다. 하지만 **적절한 긴장(Yerkes-Dodson 법칙)**은 성과를 높인다.
결핍 모드는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연료가 된다.
“잘해야 사랑받는다.”
“잘해야 인정받는다.”
이 동기는 무섭도록 강하다. 명문대에 가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이 에너지를 사용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충만 모드는 성적을 올리는 모드가 아니다. 존재를 안정시키는 모드다.
자기 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충족될 때 내적 동기가 살아난다.
결핍 모드는 외적 동기를 강화한다. 보상과 처벌, 인정과 비교가 중심이 된다.
충만 모드는 조건을 제거한다.
“못해도 괜찮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
그러면 공부는 생존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선택이 된 활동은 지속 가능해진다. 하지만 선택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강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충만 모드는 성적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학창 시절 수포자였던 사람들이 마흔이 넘어 수학을 다시 공부한다.
“왜 그때는 그렇게 싫었을까?”
“지금은 왜 이렇게 재밌지?”
그때는 시험이 있었다. 비교가 있었다. 존재 가치가 성적에 묶여 있었다. 뇌는 그것을 위협으로 인식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인지 자원이 줄어든다.
지금은 다르다. 굳이 안 해도 된다. 호기심으로 한다. 못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협이 줄어들면 도파민 회로가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그래서 원리를 깨달을 때 짜릿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
그렇다고 갑자기 1등급이 되는 건 아니다. 단지 즐겁게 지속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게 충만 모드다.
냉정하게 말하자.
상대평가 게임에서는 높은 훈련 강도와 긴장 유지가 필요하다.
결핍 모드는 단기 성과에 유리할 수 있다. 충만 모드는 정체성을 지킨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성적을 최우선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아이의 신경계를 지킬 것인가?
둘 다 원한다면 정서적 안정 위에 의도적 훈련 구조를 얹어야 한다.
이건 철학이 아니라 설계 문제다.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로또 100억이 당첨되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인정 욕구를 빼고, 과시를 빼고, 정말 하고 싶은 것만 남겨본다.
오전 3시간 커피 마시며 글쓰기.
자전거 타고 멋진 카페 가서 사유 정리.
소모임. 강연.
한 달에 한 번 여행.
그런데 놀랍게도 그중 많은 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비슷하게라도 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시를 쓴다. 자전거를 타고 카페에 가서 글을 쓴다.
이렇게 하면 신경계가 바뀐다. 뇌는 “이미 안전하다”라고 판단한다. 위협 신호가 줄어들고 기본 감정 세팅값이 올라간다.
평소 감정의 기본 세팅값이 0이라면 충만모드로 살면 100으로 올라간다. 동일한 자극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이미 다 가지고 이루어졌으니 이 세상이 감사하고 충만한 것이다. 돈이 많이 없어도 내 삶이 풍요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긍정은 생각이 아니다. 신경계 상태다. 그것이 억지로 긍정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이다. 의도적 긍정은 잠시는 가능할 수 있지만 바로, 현실은 온통 부정적이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충만 모드를 이용해 환경과 행동을 조금 앞당겨 살면 상태가 바뀐다.
이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끌어당김’의 정체다. 마술이 아니라 생리학이다.
아이와 부모가 행복하면 아이 공부가 잘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아이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결핍 모드는 성적을 만들 수 있다. 충만 모드는 인간을 지킨다.
무엇을 목표로 할지 정하는 순간 교육의 방향은 결정된다.
성적은 훈련이 만든다. 행복은 구조가 만든다.
그리고 둘을 동시에 원한다면 감정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설계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훈련 모드라 부른다. 이게 냉정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