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의 불안
어느날 아침 외출 준비를 하는데 거실에 켜져 있던 TV속 대사가 나를 멈처세웠다.
“회사는 절대 개인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무슨 드라마인가 싶어 보니 한지민 주연의 SBS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였다.
전후 맥락이 궁금해 나중에 찾아보니 장면은 헤드헌터와 인사팀 과장이 회사 핵심인재를 놓고 벌어진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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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
“오랜 세월 함께한 분입니다. 그만 흔드시죠.”
헤드헌터
“잡고 싶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면 돼요.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커리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거. 그게 당연한 시장의 논리입니다.”
인사과 직원
“시장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되는 가치도 있죠. 남의 회사 핵심인재 빼가서 분란 일으키는 분은 모르겠지만
팀장님이 단순히 돈 때문에 만 회사에 계셨던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개인의 이익이나 작은 성공보다 중요한 조직의 가치나 의리도 있는 겁니다.”
헤드헌터
“촌스럽긴. 곧 그 생각이 깨지는 때가 올 거예요. 회사는 절대 개인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헤드헌터의 마지막 말이 유독 오래 남았다.
“회사는 절대 개인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회사와 나를 동일시 하며 살았다.
회사가 잘되면 나도 같이 잘되는 줄 알았다.
회사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몰랐다.
드라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회사는 개인을 책임져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평소와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출근해 PC를 켜자 본사 매니져가 보낸 단체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메일을 열기 전 평소 습관처럼 수신자 리스트를 먼저 확인했다.
내가 속한 개발 부서 뿐만 아니라 영업, 마케팅부서도 포함돼 있었다.
“메일 수신자들은 9시까지 대회의실로 모이세요.”
쎄함이 느껴졌지만 영문을 모른체 회의실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자 한 명 두 명 모여들었고, 무슨 상황인지 제각기 추측하느라 웅성거림으로 회의실은 가득찼다.
미국 본사 매니저와 한국 인사과 담당자인 송 부장님이 무표정으로 먼저 와서 앉아 있는걸 보니 왠지 모를 불암감이 업습하면서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왜 모이라는 거야?
"무슨 일이야?
"고객에게 자료 전달하기 위해 어제 밤새서 빨리 보내줘야 하는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람.”
10여분이 흐른 후 본사 매니저가 준비해 온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화면을 본 사람들은 순식간에 말이 없어졌다.
‘Layout compensation for employees in Korea.’
한국 직원들의 정리해고를 위한 보상이라니...
웅성거림이 사라질 무렵 본사 매니저는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layoff대상자들입니다,”
그리고 해고 이후 절차를 감정없는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출입 카드 정지 날짜, 위로금 기준, 이후 일정...
설명은 있었지만 이유는 없었다.
"자~ 설명 다 했으니,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해 보세요"
준비한 자료를 다 읽고 매니저가 물었지만 회의실에는 정적만 흘렀다.
나 또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며칠 전부터 인사담당자인 송 부장님이 회의실에서 계속 컨퍼런스 콜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평소 웃음이 많던 모습과 다르게 항상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개발팀장인 박상무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한국 비지니스에 기여한 바가 큰 우리 개발팀이 왜 나가야 하는데요?"
항의의 물꼬가 트이니 여기저기서 항의성 질문들이 쏟아졌다.
"내가 고객 매출의 98%를 담당하고 있는데, 2%를 담당하는 사람이 살아남고 내가 잘리는 게 말이 됩니까?"
고객의 자료를 만드느라 거의 밤을 지샌 박 차장도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경영진은 우리를 고용 유지하려고 어떠한 노력을 했습니까? 고발할 거에요."
항의가 조용해질 즈음에 우리 팀 매니저였던 박상무가 이야기했다.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할 테니 인사부장님 하고 본사 매니저는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본사에서 이렇게 나오니 우리도 함께 대응 방안 찾아보죠."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모두들 방법을 몰랐고, 우선은 박상무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 매출은 급감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과제가 멈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회사를 상대로 각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였다.
1. 위로금 없이 버틴다.
2. 위로금 조금 더 받고 나가서 살길을 조금이라도 빨리 찾는다
그 후 면담에 들어갔고, 해고레터에 바로 싸인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의만 하고 나왔다.
박상무의 리드하에 몇 번의 협의가 있었지만,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먼저 사인을 하고 정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나도 기존 보상안에서 2개월치 더 주는 조건과 한 달 근무 연장하는 것으로 협의를 마무리했다.
세상 밖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 대통령 탄핵 집회로 시끄러웠다.
예고 없이 당한 해고로 나의 머릿속은 더욱 어지러웠다.
쓸모가 없어진 우리는 회사로부터 탄핵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사업부를 정리할 땐 일을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해고된다.
회사는 고용유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보안등의 이유로 위로금 몇 달 치로 협의를 마무리했다.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는 게 어디냐고 위로해 보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해고와 실직은 꽤나 상처로 남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첫 번째 해고를 당했다.
그때 비로소 절실히 깨달았다.
회사는 개인을 절대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준비 없는 회사 생활은,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이후 나는 더 이상 회사가 나를 책임져주길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회사가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