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리도 상복없는 배우에서 믿고 보는 국민 배우로
2012년, 브라운관에서 영화 연기를 하던 배우가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데! 내가 왜!" 나도 왜인지 그만 이 사람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이름은 '남궁민', <하얀거탑> 김명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시대엔 생소한 호흡법, 영화 같은 연기를 하던 그에게 난 눈을 빼앗겼다. 동시에 나에게 '남궁민'은 지지리도 상복 없는 배우였다. 모든 작품을 챙겨봤다면 거짓말. 하지만 난, 늘 남궁민을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배우이자. 세상 가장 강하고 꾸준하게 빛나는 사람. 드디어 소개합니다. 나의 어른, 남궁민.
남궁민과 검은 봉투
남궁민을 알게 된 이후 찾아본 건 그의 인터뷰들이었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끈 인터뷰가 있었다. 신인시절 '리틀 배용준'으로 시작하여, 혼자서 매니저, 스타일리스트를 맡던 때를 떠올리던 인터뷰이다. (정확한 인터뷰 기사를 찾고 싶은데 못 찾겠다. 혹시라도 누군가 발견한다면 알려주시라)
'검은 봉지에 갖가지 옷을 욱여넣고 한강을 바라보던 남궁민은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
나는 그가 스토브리그로 상을 받을 때도, 김 과장으로 유쾌한 연기를 펼칠 때도, 그가 인스타에 새로 산 신을 신고서 '아침 먹고 땡 집을 나서려는데' 포스팅 할 때도 그의 인터뷰 대목이 떠오른다. 검은 봉지를 등에 이고, 오직 꿈만 바라보며 '뭐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던 청년. 나에겐 남궁민은 태도를 알려준 첫 번째 연예인이자,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방이 무거울 때면, '남궁민'을 생각한다. 이 무게가 밑거름이 될 거라고.
'내 마음이 들리니?'와 데드리프트
서브 역할을 톡톡히 한 남궁민이었지만, 그가 상을 받으러 레드카펫에 올라가던 뒷모습은 쓸쓸함 그 자체였다. 그는 그를 증명할 상 하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작품을 했다.
‘벌크업 논란? 그만해... 이 사람은 2012년부터 데드리프트를 한 사람이라고!’
나는 데드리프트를 남궁민을 통해 처음 알았다. 허리 디스크로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하던 남궁민이었다. 2021년에 '남궁민 벌크업', '약물'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나오면 난 속으로 외친다. '이 바보들아! 이 사람은 9년 전! 2012년부터 운동을 해왔다고!" 작품을 기다리며 꾸준히 자신을 단련해 온 남궁민이다.
우연찮게, 당첨된 서포터즈 자격으로 남궁민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난 여느 팬들이 그랬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잠이 안 왔다. 전날 큰 수술을 하고 퇴원한 것도 한몫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촬영장에서 대놓고 사진을 찍던 나의 모습을 본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제작진분을 통해 '서포터즈 '임을 알게 되자. 국회의원 같던 모습으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너무 부끄럽고, 쑥스럽고, 그러면서도 팬들과 공유할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던 생각에 여러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완전히 찍고, 내려야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니. 그는 나에게 사진을 찍는 법을 알려준 첫 사람이었다. 그는 애교 섞인 표정을 내보이기도 했고, 나는 당황스러워 그걸 놓쳤으나 그는 다시 한번 해주지 않았다. 너무 아쉬운 순간이었다.
촬영장은 처음이라 어색한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의 행동을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드라마 에피소드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된 후에야 그가 주연으로서 어떤 책임감을 가졌을지, 촬영장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썼음을 알게 됐다. 비하인드 영상 속에서 그는 복도에서 가만히 옆에 앉아있었다. 궁금증이 많았다.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디스크 외에 또 있는지, 머리 스타일은 차기작을 위해 준비했던 것인지….' 하지만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맞았다. 문득 내가 그 나이가 되고서야 그의 어깨에 어떤 중력들이 짓눌리고 있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어른'이라 불릴 나이가 되고서야 알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에 '꾸준함'은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 남궁민을 보고 알았다.
그에게 초대박난 작품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왔다. 남궁민을 보기 전엔 나는 '초대박 스타'는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대형기획사에 의해서, 영향력 있는 거물급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그가 <구암허준>을 할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난 오만했다. 남궁민은 증명했다. 꾸준히 노력하면 빛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남궁민은 쉰 적이 없었다. 영화도 촬영하며 감독으로서 서보기도 하고, 여러 자리에서, 여러 공간에서 그는 사람을 이해하는 배우로, 어른으로 성장했다. 자신만의 철학과 소신을 꾸준히 지켜왔다.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것이다. 남궁민은 나에게 뜬금없는 엉뚱한 철학가이자, 내공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실패할 때면 남궁민을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낑낑거리며 한 움큼의 검은 비닐봉투에 옷가지를 가지고 꿈만 바라보다 한강의 풍경을 바라던 청년의 모습, 잘 되지 않던 때에도 여전히 강인한 태도를 지켜오던 사람으로, 철학과 소신을 지키며 '꾸준히' 자신만의 태도를 지켜오고 마침내 전 국민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된 배우. 그리고 그렇게 단단해지기까지 무수한 책임감을 지켜왔던 사람. 그래서 이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어른의 나는, 실패할 때면 남궁민을 생각한다. 지지리도 상복 없는 배우에게서 믿고 보는 배우가 된 남궁민처럼. 남궁민처럼 묵묵하지만 빛나고, 단단하지만 유쾌함을 잊지 않고, 책임감을 지킬 줄 아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오늘도 다짐한다.
미안해요. 그때 서포터즈 점심먹고 또 보자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갔어요... 그래서 전 지금 꾸준하게 붙어있을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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