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리듬감있는 영화
이토록 리듬감이 느껴지는 영화는 오랜만이다. 작년(2021) 12월에 개봉한 배우 '유태오'의 감독 데뷔작 <로그 인 벨지움>은 코로나로 격리된 생활에 관한 기록이자. 과거, 현재, 미래를 갈망하는 그림자극 같은 영화다. 그림자극에선 뒤집어지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가 마녀가 되기도 하고 다시 노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로그 인 벨지움>은 과거, 현재를 자유롭게 오간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중간 부분에선 난 속으로 경악했다. "이 정도로 미쳐야 이렇게 성공하는구나. 난 어떡하지?"
끝까지 보고 나면, '유태오의 고급 브이로그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해시태그로 나눠지는 에피소드들. ‘#ASMR’처럼 나눠지는 챕터까지. 영화보단 유튜브에 가깝게 표현된 문법들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 번 본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에 발 디디고 살고 싶어 했던 이의 '갈증이 느껴지는 그림자극'이라고. 그래서 세 번 봐야 한다고. 왜 세 번이냐면 '과거', '현재', '미래'까지 보기 위해서.
사람이 외로울 때. 그 사람은 진짜가 된다.
대만 영화감독 차이밍량의 명언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대담하거나 방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진 않다. 그렇다. 그냥 '유태오'란 배우가 있는데, 전 세계에 '코로나'란 역병이 퍼지면서 2주간 격리생활을 해야 했을 때 일어난 일들과 이후를 담아낸 '코로나 브이로그'일 수도 있다. 다른 한 편으론 이 역병 때문에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사라졌을 때 사라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에 관한 기록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론 궁금했다. '유태오'란 사람이. 유태오의 인터뷰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정체성'. 외로운 시간 동안 어디에도 디디고 있는 기분을 확실하게 느껴본 적 없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억지로 정체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토에서 강제로 격리되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다.
태오는 모처럼의 시간을 가지고 광야에 덩그러니 남겨진 에스파처럼 ae-태오(실제 시나리오 상 이름은 '신태오')를 만들어 냈다. ae-태오의 모습은 '비니'를 쓰고 나타난다. 태오는 ae-태오와 이야기하고, 식사를 하기도 한다. <로그 인 벨지움>은 진행 내내 '저 둘이 뭘 할까. 언제 나타날까. 왜 안 나타날까.' 하면서 둘을 의심하며 보게 한다.
ae-태오와의 만남에서 두 태오는 '영어'로, '독일어'로, '한국어'로 이야기한다. 아주 먼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듯 둘은 이야기 나눈다. 태오는 예전에 한국어로 된 영화를 볼 땐 '시'를 듣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유태오란 사람이 만든 <로그 인 벨지움>엔 리듬감이 있다.
영화의 리듬감이 꽂히는 순간이 있다. 바로 ae-태오가 텅 빈 거리에서 춤추는 순간이다.
정적인 줄로만 알았던 영화에 '리듬감'이 입혀지는 순간이다.
흑백 화면에 재즈의 선율이 가득하고, 태오는 춤을 춘다.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한 때 비보잉했던 실력을 이렇게 살리나? 싶을 정도로 태오는 춤을 정말 잘 추는데, 배경 음악 'You & Me'에 맞춰 장면 전환이 이뤄질 때 '미친...'을 말하고 만다. (극찬이다) 관객으로서도 고요함이 깨지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몰입하기 전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이 부분을 분기점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됐다.
동시에 춤추는 씬(SCENE)은 현실의 태오가 과거를 그리워하며 신태오와 함께 '올려다보는 시간'이다.
광기가 느껴지는 씬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독립영화관에서 나까지 세 명의 관객이 있었는데, 그 관에서 난, 영화의 힘에 밀려나듯, 드래곤볼에 나오는 적의 게이지를 측정하는 선글라스가 깨지듯, 이 한 장면에 밀려나고 말았다. '저 정도로 광기를 가져야 배우가 되는구나.. 저 정도로 미쳐야 영화를 극장에 거는구나...'
태오는 <Beam Drop>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싶었을까?
<Beam Drop> -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미술
<로그 인 벨지움>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Beam Drop>은 팬데믹을 겪는 무채색 세상 속 한껏 색을 끌어올린 오브제다. <Beam Drop> 장면에선 상승과 하강의 모습으로 리듬감이 나타난다. <Beam Drop>은 일정한 평수의 땅에 철근을 땅에 떨어 뜨리며 큰 소리를 만들어내고, 땅 위에 가지각색으로 꽂히는 형태의 설치미술이다. (나는 그렇게 봤다)
태오는 <Beam Drop>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난 처음 봤을 때 큰 관에서 울리는 철근 소리에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난 '비수를 꽂는 장면'인가 싶기도 했다. 외로울 때 큰 소리 들으면 슬프지 않나? 하지만 영화 속에서 철근은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하게 만드는 놀이요소다. 실제로도 그랬겠지. ae-태오(신태오)는 그렇게 떨어진 사람들의 환호가 사라진 철근 곁을 맴돌며 이리저리 뛰어논다. 무채색과 대비되는 <Beam Drop>의 색들이 장면에 남는다.
세 번째 볼 때야 비로소 보였다. 태오 머리맡에 놓인 'Beam Drop' 아트북. 나는 그만 춤추는 장면에 홀려 두 번째 볼 때도 'Beam Drop'을 왜 이리 좋아하는지, <Beam Drop>이라는 설치미술에 태오가 서성이는지 몰랐다. 세 번째때 여유를 가지고 나서야 눈에 띄었다. 격리생활을 시작할 때, 대본을 연습하며 머리맡에 놓인 책이 <Beam Drop>이었다는 것을.
영화가 끝나갈 때 태오는 산에 낑낑 올라가고 나서 돌무덤을 쌓고는 허무하게 무너뜨린다. 태오만의 <Beam Drop>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간 화면엔 비니의 ae-태오가 등장한다. <Beam Drop>에 서성이는 태오. 돌무덤을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태오는 진짜 태오다. 태오는 왜 Beam Drop을 사랑했을까. 태오는 왜 자신만의 돌무덤을 무너뜨렸을까.
이곳에서 가장 자유로운 비눗방울. 그런데 내 피가 섞인.
멀리멀리 퍼져나가렴, 창 밖을 못 나서는 이가 만든 비눗방울 - "한 방울의 피라도 100%의 피야"
태오는 ae-태오와 식사 후에 체기를 가진 채로 손을 따며 핏 몇 방울을 주방세제 물에 섞는다.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그린 장면처럼 경건하다. 태오는 피가 섞인 주방세제 물로 비눗방울을 만들며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날려 보낸다. 그러면서 얘기한다. 자신의 스승이 말했듯이 '한 방울의 피라도 100%의 피야'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 비눗방울은 자기 자신이겠지.
'특권의식'과 '자유'
과거, 현재, 미래의 태오가 계속해서 말하는 단어가 있다. '특권의식'. 대체 태오에게 '특권의식'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에서 '특권의식'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묻기 위해 두 번의 GV에 힘들게 참여했으나, 무참히 답을 얻지 못했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비말로 전염되고 마는 '마스크가 필수'인 시대에 '유일하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정한 권리'겠으며,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을 분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태오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피곤하다 말한다. 하지만 귀국 후 촬영에 임하는 태오는 스태프들과 뭉치고 흩어지며 계속 웃는다.
‘특권의식'과 '자유'로 계속 쌓이는 이 영화 속 두 단어는 계속 허기지는 갈증처럼 이야기의 끝까지 말하는 단어다. 어쩌면 이 두 단어가 영화의 정체성이었을까.
신태오가 태오에게 묻는다. "태오. 너에겐 자유란 뭐니?" "두려움 없이 사는 것." 그것이 가능할까 생각하는 사이에 '특권의식'이란 말이 떠오른다. 관객은 우두커니 '특권의식'이란 단어를 곰곰이 씹어본다…. 태오에겐 '특권의식'은 무엇이었을까. 팬데믹 시대에 유태오란 사람의 혼란을 나타낸 단어였을까.
태오를 위한 식탁
'그룹'으로 만들어 주는 '식탁' - 혼자에서 공동체로
외로움과 부유한 마음을 채우는 것은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다. 태오에겐 '만두'가 외로움을 채우는 음식이었다면, 허기진 외로운 마음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었다. 하나의 구성원에서 제한시간을 가졌던 공유 식탁은 한국 처갓집에 와서야 모두의 공유 식탁이 되고, 제한이 사라진다. 어쩔 수 없이 비건 레시피로 만들어진 만두는 '진짜 고기만두'가 된다.
만두에 진짜와 가짜가 어딨겠냐만은 팬데믹으로 텅텅 빈 마트 진열대에서 풍족하게 정리된 '비건 식품'은 묘하게 다른 세계 같다. ‘진짜’, 그러니까 '현실'을 기반으로 둔다면 그 진열대는 마치 허상처럼, 그러니까 '가짜'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한국에 돌아와서 비로소 다 같이 먹는 밥상에서 먹는 만두는 '진짜' 고기만두가 된다.
<로그 인 벨지움>에서 혼자와 공동체를 구분하는 잇템(it-item)은 '만두'다.
만두와 김밥 - 싸 먹는 음식의 대비
<로그 인 벨지움>을 보다 보면 형태에 집중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태오와 ae-태오(신태오)는 비니와 옷차림 형태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왜 하필 만두였을까' 감독 유태오는 GV에서 과거 할머니가 싸주시던 장면과 함께 만두를 만들어 먹던 기억에 관한 향수가 있고 했다. '만두'는 감싼다. '김밥'처럼, 많은 것을 감싸 안고 한 번에 쉽게 먹을 수 있다. 만두는 K-음식의 정석인 김밥과 닮았다. 그것은 꼭 외국에서의 한국의 음식과도 닮아있고, 한국이기 되기도 한다. 마치 혼돈 한가운데 서있는 정체성처럼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태오는 더 이상 식당에 들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초대받고, 마음껏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대화할 수 있다.
광기의 하리보가 외친다. "자유" - 이것이 고독의 광기인가?
아이패드로 콘서트를 보던 태오에서 카메라 시점이 바뀌면 하리보가 하나 둘 등장하더니 빛에 눈이 멀 정도로 하리보가 많아진다. 그리고 하리보는 테이블 하나로 관중과 가수로 나뉜다. 마치 하리보가 하리보들에게 명령하듯 노래한다. "자유!"
<#하리보 챌린지> 장면에선 '과거를 그리워해서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으나 사실 이것은 틱톡에서 유행한 하리보 챌린지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태오는 이 장면을 연출하기 전에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았나 먼저 찾아봤다고 한다... 귀여워..
마지막일 겁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한편, 한국에서의 태오는 상을 받고, 분장실에 돌아와 턱시도를 탈의하며 자신을 페이드 아웃한다. 동시에 신태오가 등장한다. 신태오가 말한다. "Sit Down". 태오가 시나리오를 연습하던 첫 대사와 똑같이.
그에게 턱시도는 특권의식의 연장성일까? '무게'를 벗는 것일까. 계속 입었던 ‘체 게바라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좀 더 자유로워져 보인다.
한 번이라도 외로워서 포용이 필요했던 사람에겐 <로그 인 벨지움>이 위로가 가득한 세계가 될 것이다. 그의 노래처럼.
날 사랑하고 꼭 껴안아줘.
모든 내 꿈을 기억해줘.
주체할 수 없는 삶을.
독자들을 위한 번외 편
- 내가 들었다. GV에서(feat. 내 말로 한 번 걸러진)
Q. 스마트폰으로 찍을 때 누가 가지고 갈까 무섭진 않았나?
A. 그랬다. (스마트폰) 훔쳐갈까 봐 얼른 찍고 얼른 가져갔다. 춤출 때도 경찰 뜰까 봐 얼른 찍고 이동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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