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빠진 용기를 쥐니고서
"네 열정은 낡았고, 용기는 녹슬었는데. 내게 더 이상 뭘 더 줄 수 있지?" 세상이 물었다. 그러자 내 안의 시라노가 대답했다. "낭만"
1막이 시작되자 모두가 시라노를 찾는다. "어서 오세요."라며 시라노를 보기 위해 온 관객들을 맞이한다. 시라노에 이렇게 진심일 생각은 없었다. 프로그램 북의 류정한 프로듀서의 말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라노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힘겨운 순간마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진정성이란 말이 무색해진 이 시대. 시라노는 최후의 낭만주의적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낭만이란 달빛 아래의 사랑 고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의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웅은 거창한 존재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작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진정성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바로 영웅입니다. 정의로움, 사랑을 위한 희생,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 이것이 바로 시라노가 보여주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 뮤지컬 <시라노> RG컴퍼니 류정한 프로듀서의 말 중에서
무대가 끝난 뒤 소란스러운 갖가지의 모습이 가라앉고 나면, 그곳에 시라노가 있었다. 무대 위에 더 이상 싸울 적은 없다. 시라노는 군중 속에서 그를 볼 때 가장 빛나는 극이다. 황홀함과 후회, 슬픔과 두려움들 가운데 시라노가 있다.
시라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곧, 가스콘 용병대 Reprise>는 전장의 군인으로서의 각오를 노래한다. 시라노 정신이 보이는 중심 넘버중 하나다. 죽으면 끝인 유효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불사할 것처럼 노래한다. '시라노'하면 빠질 수 없는 낭만 또한 놓지 않는다. 무대 위 시라노와 가스콘 용병대는 당장이라도 적이 보이면 없애버릴 듯하다. 객석은 자연스레 그들의 각오를 지켜보는 군중이 된다.
객석온도는 어떠한가. 그들과 같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차가워지는 사람이 있다. 칼과 방패, 총으로 싸울 수 없는 고고한 일상에서 우리는 가스콘 용병대만큼 목숨을 내놓고 싸울 만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낭만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라노에 열광하는 건 아직까지도 그런 사람들의 열망이 유효하고, 그들의 열정에서 뜨거움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손짓 몇 번에 관계를 맺기도, 끊어버리기도 쉽다. 키보드는 연필로 꾹꾹 써 내려가는 수고로움을 대신한다.
수고로움과 애정이 쉽게 우스운 세상이 되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마음, 생명은 돈으로 값을 매긴다. 가끔은 누군가의 슬픔이, 추모가 지겹다며 그만하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한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목격자가 될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 한 번이라도 시라노였던 사람은, 가스콘 용병대처럼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세상엔 사랑해야 할 것도, 싸워야 할 것도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겐 가스콘 용병대는 '진지함' 그리고 '용기'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어느새 나이만큼 낡아버린 용기와 비틀거리는 자신 사이에서 좀처럼 서 있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필시 차가울, 나를 이렇게 낙오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가고 싶다. 그들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의 가장 뜨거운 것을 없애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삶이 빌어먹을 쌉싸름한 포도주일지라도, 나는 아름다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조언을 쓰고 읊으며 용기와 사랑을 과자 조각처럼 하나씩 세상에 떨군다. 오늘도 야윈 초승달을 보며 생각한다. 깎여가고 차오를 시라노의 시간을 겪고 있다고. 그런데 어떡하지. 세상은 시라노가 필요하지 않다는데.
디지털 시대에 낭만은 힘 있는 단어였는가 싶은 요즘이었다. 그동안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편지를 썼다. 그것은 때론 나를 알아달라는 내용이었고, 때론 사랑이었고. 우정이기도 했다. 시라노에겐 늘 어설픈 농담도 들어 줄 록산도 있었지만, 이 세상에 록산은 귀한 존재였다. 도리어 이 세계에서 시라노는 너무나도 흔해서, 록산처럼 기다려 주는 이도, 크리스티앙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도 없었다. 시라노의 완성은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있어야 했다. 어떡하지. 그사이 세상은 나이로 나를 판별하기 시작했다. 시라노는 변함없었다. 시라노는 아무도 듣지 않는 연설을 혼자 중얼거리는 치매 노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등은 구부정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 고약한 소리만 해대는 전쟁 후유증을 겪는 미쳐버린 노인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나처럼.
청년이라 부르기엔 늦고, 어른이라 하기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이의 나를 보며 세상은 말한다. '접어든' 나이에 든 나의 꿈도 접히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나의 시라노여. 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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