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에 관한 이야기
제목에 이끌려 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세계를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이슬아 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느새 담백하고 솔직하면서도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어떤 이의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됐나 보다. 너그러움을 담고, 사랑과 용기를 담은 글을 써 내려가는 그녀와 얽힌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렇게 알게 됐더랬지
난 세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인스타 피드엔 세련된 사람들이 가득하다. 세련된 표현법을 잘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특히 오래전부터 팔로잉한 BJ의 피드는 세련되고 시시한 농담이 재밌다. 그는 목소리 대유잼 사람, 도서 문화 혹은 갖가지 문물의 인플루언서, 내겐 문익점 같은 사람. 아프리카 BJ '마성의 사슴'이다. 그녀의 피드로 혹은 방송으로 책을 알고, 노래를 알게 되는 때가 많았다. 이슬아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망원동 글방을 시작하는 홍보 게시글이 업로드되었을 때, 이슬아란 이름을 알았다. 그땐 아마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민을 했었다. '아 지금 당장 입금이 어려운데, 어쩌지. 한다고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다가 결국 마감되었다. 그리곤 다시 열리지 않았다. 갈까 말까 고민할 땐 가야 한다. 후회로 시작했던 이름, 이슬아. 그녀의 이름을 또다시 본 건 또 사슴의 피드였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날마다 뭐라도 써서 보낸다!'
굉장히 레트로 하면서도 당찬 포부가 느껴지는 포스터 이미지. 하지만 덜컥 구독할 수가 없었다. 확신이 없었다. 기다릴 자신은 더 없었다. 낯선 방식이었기 때문에 생소하기도 했다. 큰 부담이 느껴질 만한 일도, 그런 가격도 아닌데, 거의 매일 책을 샀으면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전에 후회했었기 때문에 충동질은 더 심했다. 후회할까 말까. 그도 그런 것이 문장만 마음에 들어서 산 책 백몇십 페이지에서 성적 수치심이 느껴질 만한 글을 보고 불쏘시개로 만든 이후여서 더 그랬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나만 알고 있는 나와 (일간) 이슬아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던 10월, 그녀가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봤다. <일간 이슬아> 단행본과 함께.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 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 중요한 날, 특별한 날에 들고나서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함께 나섰다. 관심 있을 것 같은 친구에게 미리 소식을 전하고, 약속을 하고 먼저 갔다.
인터넷으로 내적 인연을 쌓게 되면 깜빡이를 잊게 된다.
정말 뜬금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이날만을 기다렸다면서 "사진 찍어드릴까요?" 묻는 사람이라니. 깜빡이 없이 들어가는 이 마음은 어쩜 좋으려나 갑자기 속에서 뒤늦은 부끄러움과 설렘 같은 게 막 요동칠 때 동료 작가이자 친구분께서 흔쾌히 웃으며 포즈를 잡아주셨다. 두 사람이니, 두 명 몫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서 난 여전히 깜빡이를 올리지 않고 두 컷을 찍었다. 그들은 이따 공연도 있으니 오라는 말을 건넸다. 참 다정한 사람들이다. 꼭 가겠다고 말하고, 폴라로이드 특성상 사진이 인화될 때까지 잠시 잘 현상해오겠다며 말하곤 방금 찍은 사진 두 장을 가장 따뜻한 주머니 속에 넣고 구경을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낯설고 부끄러웠을 시간이었겠지만, 이제 곧 올 사람이 있다는 혼자만의 의기양양함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에서 본 이슬아 작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캐주얼하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내겐 없는 세련됨이 보였고, 어떤 때는 내게도 있는 고단함이 보였다. 연재 노동자라니, 학자금 대출, 그리고 가늠해 볼 수 있는 나이대 같은 게 통했던 것 같다.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인 양다솔 작가는 공연장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타고난 유머러스와 세련됨이었다. (양다솔 작가의 책 <간지럼 태우기>도 대유잼이다. 읽으면 더 매력 있어.) 세련되고 세련되다. 흑흑 그에 비하면 난 깜빡이 없이 표현만 직진하는 고속도로 트로트 테이프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들르는 휴게소에서 갑자기 울려 퍼지는, 예상 가능한, 떠올리면 그려지는 그런 뻔한 사랑 고백 가사를 큰 목소리로 부르는 사람.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모든 인사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책을 풀었다. <일간 이슬아> 단행본은 소위 목베개라 불리기도 하는데 아주 두꺼운 사이즈였지만 왠지 글을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읽은 것처럼 설렜다. 그녀가 쓴 글이라면, 백몇 페이지를 읽고 있어도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 정말 그때 기억만 가지고 그해 11월, 제주도와 부산 여행을 가서 너무 괴로운 시간에 그녀의 책을 머리맡에 두고, 가끔은 껴안으며 잠들었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어느 책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에세이라고 생각했다면 경기도 오산을 넘어 시흥으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동성 간의 첫 키스라던가, 누드모델을 했다던가, 자기 몸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가지고 있었다던가, 혹은 김연아란 사람에 대한 어떤 부러운 마음이라던가. 한 번은 겪었을 이야기고, 아니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화일까. 이 모든 이야기가 정말? 그랬다고? 어떤 때엔 그녀의 글에 등장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이런 표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라니. 난 아무리 표현해도 '날 좋아할까 봐 일부러 당일에 생일 축하 안 했어'란 왕자병 같은 개소리만 듣고 지냈는데, 이런 게 가능한가 싶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세련되고, 덤덤한 표현들. 그렇지만 가볍지 않은 마음들이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도. 어쩌면 이렇게 일상에서 엉켜있던 마음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
뭉클해지면 뭉클해질수록 이슬아란 사람이 걱정됐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글을 메일 서비스하고, 인터넷에 남기는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이 걱정됐다. 이런 글이 인터넷에 남는다고 생각하자니,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전장에 나간 사람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겨울, 1월. 한남동 <스틸북스>에 그녀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또 인스타로 봤다. 타이밍이다. 혹시나 이 소식을 모르는 친구가 있을까 싶어 주변 친구에게 연락해 두 명의 자리를 잡았다. 친구는 관심은 있는데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라고, 엄청난 팬이 아니면 안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 친구 참 섬세하다. ”야 가자 가자. 뭐? 책을 다 안 읽었다고? 괜찮아. 가면 또 반하게 돼서 더 읽고 그러는 거야.”라며 친구를 독려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너그러운 독자
<스틸북스>. 대충 카카오의 어떤 시도, 책이 있는 곳. 그 정도만 알고 갔는데 생각보다 정말 큐레이션이며 공간이며 대기업의 자본이 제대로 훑고 지나가 경이로움마저 들기도 했다. 강연장에 들어서니 이미 몇몇 팬들이 와있었다. 강연 중간에 화장실을 가는 건 맵시가 없기 때문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이슬아 작가님이 보였다. 모르는 척했다. 강연 시작 전에 박태환처럼, 프로들은 준비 시간에 무척 긴장되고 나름의 집중이 필요한 트레이닝을 할 수도 있으니까.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며 이번엔 사랑의 깜빡이를 켰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주섬주섬 노트와 속기사용 연필 샤프를 꺼냈다. 곧 스크린에선 어떤 외국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유튜브 영상이 띄워졌고, 스피커에선 코가 얼큰한 추위를 덮는 포근한 노래가 들렸다.
곧 강연이 시작됐다. 그녀는 좋은 컨디션으로 오기 위해서 몇 가지 노력을 했다는 얘기로 이야길 시작했다. 그녀는 강연에 서기 전까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고, 어떤 상태인지를 언급했다. 그때부터 반했던 것 같다. 그냥 스킬적으로 발표를 잘하기 위해서 느끼한 멘트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서. 이 시간을 위해 꽤나 마음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아래서부턴 메모+기억 의존 주의)
"어디서도 하지 않은 얘기를 매번 강연이나 북 토크 때마다 하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를 하는데, 사실 얼마 안 살아가지고 얘기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강연 때마다 다른 얘기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왜냐면 같은 얘기를 장면만 바꿔서 얘기하는 제 모습 가증스럽거든요."
"그런데 아까 들은 노래 말이에요. 제가 그 노래 듣고 맨날 우는데, 오늘은 강연이어서 참았습니다. 그 노랠 들으면, 누굴 사랑할 때마다 그 노랠 듣는데.. 사실 혼자 있으면 특별해지기가 쉽지 않잖아요. 누가 나를 특별하게 봐주고, 사랑해줄 때 갑자기 나도 새로운 사람인 것 같고, 특별한 사람인 것 같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들으면서 웁니다. '맞아. 나는 혼자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오늘도 앞에 60명이나 계셔서, 제가 좋은 사람 같고 그렇습니다."
아 이렇게 또 반하게 하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아무리 많은 작가들의 강연에 갔어도 이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건 처음이다. 매번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니. 이렇게 세련된 배려라니. 이런저런 그녀의 다사다난한 글쓰기 이야기가 오가고 기다렸던 질의응답 시간이 왔다. 나는 퀴즈 프로그램에 아는 문제를 들은 출연자처럼 버저를 울리듯 손을 번쩍 들었다. 첫 타자다.
"강의 초반에 말씀해주신 '욕먹는 작가'와 '우아한 독자'의 연장선일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일간 연재하실 때도 그렇고, 항상 글쓰기를 하시면서 지금 내가 쓰는 글이 내일이 되면 과거가 되잖아요. 혹시 이게 미래의 나를 질타하는 근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으셨는지, 있으셨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제가 쓴 글이 미래의 나를 질타할 글이 된다는?"
"네. 독자들이 슬아님의 글을 보고 나서 보내는 메일처럼, 느끼고 표현하는 반응들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슬아님 그렇게 살면 안 됐죠.' 나중에 '저번에는 이렇게 사신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가치관이 바뀌셨네요? 정말 당신은 앞뒤가 다른 사람이군요.'라든가. '그건 너무 포비아적인 발언 아니신가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셨는지.."
"되게 무섭네요. 맞아요. 그런 생각은 글을 쓰면서 맨날 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나를 상처를 입히는 것도 무서운데, 과거의 내가 나를 덮칠 때. 그런데 그런 것을 또, 많은 분량으로 매일 남겼으니까. 전 진짜 미래에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고.."
"현재 진행형이신가요?"
"맞아요. 미래의 나를 망치는 건. 바로 과슬이(과거의 이슬아)니까. 그리고 텍스트라는 건 박제가 되는 거니까. 예를 들어서 5년 뒤에도 텍스트의 모양으로 남아있을 테고, 그렇게 자료가 계속 모이고, 트위터에서도 언제나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에, 일간 연재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극복을 못 했고요.
앞으로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는데. 너무 잘못 쓴 것이라면, 반성을 해야 되겠죠. 내가 그렇게 생각 없이 빻은 글을 썼구나. 생각 없이 써서 정말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될 것이고, 앞으론 안 그러야겠다고 스스로도 다짐을 해야겠죠.
부디 나의 독자들이 너그러운 사람이길. 왜냐면 독자님들도 계속 변하는 사람들이니까. 나도 계속 변하고 있음을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매일 밤 기도합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말 제가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그렇지만, 뭐랄까‥. 예를 들어서 맨 뒤에 제가 추천한 세 권의 책이 놓여있는데요. 스틸북스에서 세 권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셔서 추천해드린 건데요. 그중에서 맨 왼쪽엔 <박완서의 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박완서 선생님의 말이 담겨있는 책인데, 저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정말 좋아해요. 정말 기깔나게 재밌는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시대의 한계를 담을 수밖에 없잖아요. 박완서 선생님도 당시 시대를 엄청 치열하게 살아낸 분이시지만, 지금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기엔 너무 낡은 말들을 하시기도 하셨죠. 그런데 그거는 어쩔 수 없죠. 그 당시에 최선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부디 이렇게 이해받기를 바라고 있어요. 어떤 똑똑한 독자분들이 당시 2018년의 이슬아의 최선이었음을 부디 알아주시기를.. 바라봅니다. 그것밖에 할 것이 없고. 그렇기 위해서 저도 다른 작가들이 쓴 것을, 시대를 이해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너그러움….' 잊고 산 말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너그러워 본 적이 있었나. 너그러웠었나. 너그러울 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지? 너그러운 사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지. 잊고 있었다면 용왕 간을 가지러 온 거북이에게 거짓말하듯 너그러움 따윈 툇마루에 놓고 왔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그건 어떤 상황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야 했다. 네이버 쇼핑에 검색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언제 배웠는지 천천히 인큐베이터부터 초중고를 지나 파란만장 20대를 다 거쳐서 너그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너그러운 순간들. 과연 나는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이었을까.
너그러움은 단단하다. 이해를 품으면서 따뜻하고 중심이 있다. 온화한 얼굴이다. 눈은 미간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겁내지 않고 볼 것이다. 그런 순간은 많았는데,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나는 너그럽지 못했다.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너그러워 본 적..
너그러울 수 없는 한계는 분명하다. 완강한 사람과의 대화엔 너그러움을 말할 수 없다. 결국, 상대도 너그러워야 한다. <일간 이슬아>는 그런 사람이 쓴 글이다. 너그러움을 받고 줄 수 있는 사람의 글. 인연이니 바람이니 순간의 인연도 소중하게 여길 것처럼 해놓고 자신의 독자를 무안하게 만드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구면이네요
독자들도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까. 얼마나 많이 궁금했을까. 얼마나 떨렸을까 싶은 질문과 답들이 오갔다. 기억을 자기 언어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공간은 소중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따사롭다. 시간이 지나고,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구면이네요."
"어? 기억하시네요?!"
"네. 사실 아까 강연 전에 알아봤어요... 하핫"
"헐.. 저돈데! 일부러.. 그 방해 안 하려고.. 너무 웃기다 으하!"
"이름 알려주세요. 기억하게요."
"우와.. 제 이름은 …."
아무튼, 이슬아
이슬아의 피드를 보고 있다 보면 강연에서 한 이야기에 확신이 선다. 도서 출판 생태계를 위하는 마음,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도 전부.
이슬아를 통해 알게 된 이름이 많다. 정혜윤, 양다솔, 김한민, 유진목, 금정연, 김원영…. 이슬아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름들, 서점에서 스쳐 지나갈 표지 속 이름들이었겠지만, 이슬아는 이들의 이름을 선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알려주었다. <일간 이슬아>가 좋은 이유다. 오해하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리웠으니. <일간 이슬아>는 확실하게 알려준다. 모호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리석다거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지난 2019 <일간 이슬아>에서 본 김한민 작가의 인터뷰는 큰 변화를 줬다. 채식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육식을 아예 단번에 끊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지 학교에서 한 수업보다는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간 이슬아>는 김한민 작가의 책을 읽게 했고, 비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인지, 오해에 완벽히 맞서는 답변을 보게 했다. <일간 이슬아>의 김한민 인터뷰를 본 이후엔 커뮤니티에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조롱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아무말대잔치에 개의치 않아졌다. 내겐 그것만으로도 2019 <일간 이슬아>는 좋은 시도였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성공을 가리켜 인스타 감성의 글이라며 아까운 만 원이었다고 한다. 등단한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등단하지 못한 사람의 유행이 못 미더워 보인다. 과연 그럴까. 서점 서재는 등단한 작가/ 아닌 작가로 나뉘어 있지 않다. 게다가 SNS 최전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파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을 갖추지 않고서야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스타 감성이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말이었다면 인스타 감성의 문장도 유효하다. 그녀가 보내는 글은 하루에 500원이다. 책 한 권을 사려면 대개 10,000원이 넘는 돈을 들여야 한다. 만 이천 원에서 만 오천 원가량의 책을 돈 주고 산다 하더라도 실망할 때가 있다. 공들여 기울여서 산 책이 한 구절 한 구절 다 책 값어치를 다 하지 못할 때도 있다. 모든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더 많다. 그중에서 한 문장이라도, 한 편이라도 울림을 주었다면 그 책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만원이란 소중한 돈을 냈는데, 지각이 잦다고도 한다. 기억하기론 2, 3번 정도였지만, 글을 안 보낸 적은 없었다.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와 있는 일이었으니까.
모든 글이 내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간 이슬아>, 이슬아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는 유효하다. 글에서, 강연에서 본 그녀의 이야기가 건강했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세계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은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응원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녀의 시선으로 본 사람이, 세상 이야기가 보고 싶다. 그녀가 설령 두려워한 때가 오더라도 너그러운 독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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