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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y 26. 2022

양립할 수 없는 이지와 욕망

금각사 by 미시마 유키오


미적 세계는 늘 나에게 명확했다. 영혼의 고양상태. 에너지 머금은 전자(electron)가 들뜬 상태가 되듯, 미의식의 탈주선 위로 갑작스레 튀어 오르는 감성적 도취, 그것이다. 탈주선의 천공은 현실에 지친 자아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망아’의 세계다. 희극의 형태로도 비극의 형태로도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다. ‘망아’를 특징으로 하는 만큼 그곳, 미적 세계에 시간을 무한히 연장하여 머무른다면, 인간이 어찌 ‘존재’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현실이 내 존재를 전제하고, 내 존재가 현실을 전제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미조구치의 미적 세계, 금각사는 묘하다. 항상성과 관조성이 낯설다. 다른 종류의 미라고 치부하기에 석연치 않는 뭔가가 있다. 그 뭔가는 자발적이지 않은 내면의 거부다. 대체 절대성을 가진 미가 다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닌가? 범주화는 상대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미조구치의 미는 이렇게나 이질적일까? 서술을 구조로 하는 글이 늘 그렇듯 질문에 대한 단서는 미조구치의 인식 세계에 있다. 그의 성장과 함께 변모해가는 미의 의미를 단서로 그의 금각사를 형상해 볼 일이다. 지극히 나다운 해석을 해 보려 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할 수 없는 아이는 상상의 세계를 키운다. 그 양이 많아질수록 스스로가 만든 세계는 더욱 뻗어 나가고 그 크기는 ‘살이 찌게’ 된다. 미조구치가 그런 아이다. 혀 끝에서만 돌다가 삼키고 마는 그의 이야기는 조각 조각 금각의 일부가 된다. 초라한 외계에서 철저히 차단된 금각이 내계가 되니, 금각은 반대급부로 미의 절정을 이룬다. 당연한 것이다. “무언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을 지닌 소년이, 자신을 은근히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9)”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소년의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24)”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소년이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24)”가 있다. 금각이 지어진 역사를 빗대어 한 진술이기는 하지만 미조구치에게 이보다 더 이상적인 비유는 없다. 그의 금각이야말로 미조구치의 어둠 속에서 탄생한, 미조구치만의 금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금각의 존재 조건은 미조구치의 어둠인 것이다.


소년 미조구치에게는 분명 ‘음(陰)’의 맹아가 있다. 태양과 같은 찬란함을 순수 미로 인식하지 못한다. 미묘한 질투심을 담는다. 영웅과 같은 사관생도의 아름다운 단검에 흠집을 내는 것으로,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13)”인 ‘유일한 긍지’를 발휘한다. 우이코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의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도 한다. “배신 행위로 인하여 드디어, 그녀는, 나까지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 순간에야말로 내 것이다!(21)”라는 그의 진술은 그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배신이라는 ‘흠’이 생김으로써 자신과 동류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우이코가 결국 배신을 하지 않았음이 밝혀지는 순간, 미조구치의 관심은 심드렁해져 버린다. 우이코의 죽음은 그의 관심밖이다. 어머니의 불륜 또한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추함은 오히려 그에게 안정감을 준다. 불륜의 밤에 아버지가 자신의 눈을 가린 부정(父情)에 오히려 복수 의식을 갖는다. 미의 순수 영역에 있는 숭고한 부정은 그에게 적대적인 대상일 뿐이다. 전쟁으로 금각이 멸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금각을 절대미의 위치에서 미조구치의 높이로 끌어내린다. 그가 가장 금각을 사랑했던 시기이며 또한 “금각으로부터 나쁜 영향, 혹은 그 독(毒)을 받지(50)” 않았던 때이다. 필멸이라는 ‘흠’이 있는 금각에 동화가 된 때이다.


그에게 소년 특유의 ‘양(陽)”의 영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친구 쓰루카와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주름이 졌지만 하얗게 빛나는 셔츠를 입은’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의 음을 양화시킨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어둠을 쓰루카와에게 투사하여 여과하면 그의 “혼탁하고 어두운 감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투명한 빛을 발하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62)”이다. 자신의 어둠이 행동하지 않고 감정에만 머물러 있다면 최악이든, 최선이든 겉보기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자신의 추함도 결국은 ‘무’임을, 추함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음을 쓰루카와에게 배운다. 하지만 그를 양으로 인도 했던 쓰루카와는 갑작스레 죽게 된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밝은 대낮의 세계를 잇는 한 가닥 실(135)이 끊어지고 그는 빛을 잃어버린다.


쓰루카와가 양의 기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양의 화신이라면 가시와기는 음의 화신이다. 가시와기는 끊임없이 미조구치의 음의 영역을 자극한다. 전후 한 사관의 악행을 접하며, 세상의 무질서, 세상 사람들의 악의 행태를 깨닫게 되는 미조구치, 자신은 내계의 악으로 세상에 대응하리라 생각한다. 차츰 그는 악을 인생, 삶과 동격화 시키며 악의 극단으로 가기 시작한다. 가시와기는 그를 “인생으로 재촉하여 주는 친절 또는 악의(131)”를 베풀고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131)”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또한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꾸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131)”을 발휘한다. 미조구치가 가시와기의 방식에 수긍을 하면서, 삶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시와기의 행동들이 다소 극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실제 인생에서 흔하게 만나게 되는 삶의 형태 아닌가? 더구나 미조구치는 세상으로부터 소외 당한 아이로 자라오지 않았나?


 금각은 이제 미조구치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자신의 어둠을 전제로 존재하는 금각은 단지 존재의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긍지이면서도 질투의 대상, 그 자리에 만족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느새 금각은 자신의 악을, 인생을, 위협하는 관조의 세계가 되어있다. 악을 추구하는 행태를 인생이라 생각하는 그에게 금각은 독소를 발휘하여 인생을 순식간에 멸할 수 있다. 그가 한 때 그토록 기꺼워하던 금각의 정화작용, 인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그 느낌은 자신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어있다. 사실 금각은 스스로 변화한 것이 없다. 흐르지 않는 물처럼 절대적 위용을 자랑하며 늘 그 자리에 있다. 변한 것은 미조구치다. 악의 극점으로 자신의 입지를 옮겨갈수록 그의 위치에서 보는 금각이 달라질 뿐이다. 결국 미조구치의 인식의 세계가 변하는 것이다.


“미라는 것은, 마치,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 의사에게 뽑아 달라고 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이건가? 고작… 중략…’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152-153)”


가시와기의 입을 비긴 하지만 미조구치의 금각을 한 마디로 형상화한 말이다. 미조구치의 미가 생경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의 미는 망아의 세계에 있지 않다. 늘 그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삶의 중심에 서서 미조구치가 가려는 길을 막고 있다. 금각의 관조에는 쓰루카와의 죽음과 함께 억압된 미조구치의 ‘양의 기운’이, 신의 목소리인 ‘양심’이 서려있다. 이 관조를 미조구치는 견디지 못한다. 자신을 질책하는 이 침묵을 그는 증오한다. 그가 주지에 대해 키우는 증오도 침묵의 관조가 그 원인이었음을 짐작해 본다.


미조구치는 마침내 금각에 불을 지른다. 관조를 베어내는 행동이다. 인식 속의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금각에 대한 해탈을 위한 의식(ritual)이다. 이 해탈로 미조구치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투탈자재 해지리라.(268)”


‘남천참묘’의 공안에서 남천은 ‘미’를 베어내는 행위자요, 조주는 ‘절대미’앞에 한 없이 겸손한 수용자다. 미조구치는 금각의 환영을 인식 속에 만들어 낼 때, 미를 경외하였지만 음의 욕망에 스스로가 매몰되어 가면서 그는 ‘미’를 베어내는 집행자, 남천이 된다. 미조구치는 금각을 베어내며 삶에 대한 의지를 내 비추지만 눈에 보이는 투사물일 뿐인 금각을 해 한다고 해서 진정한 미가 없어 질리 없다. ‘이지’의 세계 금각, ‘욕망’의 세계 삶, 이지와 욕망 속에서 타협을 하고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삶의 모습이다. 다만 순간의 선택이 벼린 날처럼 존재를 위협한다면, 고통의 근원이 이지에 있을까, 욕망에 있을까? 미조구치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지와 욕망은 모두 자신에 속해져 있다. 자신이 존재하는 한 금각은 사라질 리가 없다. 관조의 세계가 고통스럽더라도 삶을 살아가려면 화해가 필요하다. 덜 고통 받으면서도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점, 그 균형. 여기 조주의 자세를 그는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았지. 그는 말하자면, 충치의 아픔을 참는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야.(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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