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 혹은 PPT 디자이너
오늘은 제가 몇 년째 일하고 있는 스텝(Staff) 직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먼저 스텝 직군은 규모가 있는 회사에 주로 있는 직군인데 주역할은 CEO, CFO 같은 경영진들에게 회사의 이슈와 전략을 정리해 보고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스스로를 '서기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딱 그 역할이거든요.
그나마 제가 있는 전략팀은 회사가 나아갈 전략을 짜기는 하지만... 그걸 경영진에게 알기 쉽게 보고하기 위해 PPT 혹은 Word로 정리하는 일의 비중이 매우 높아요. 여기서 핵심은 '알기 쉽게'인데 전달력 높은 자료를 만들기 위해 문장과 구성을 몇 번이고 바꾸죠.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전략을 짜는 건지, PPT 디자이너 일을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죠.
이런 스텝 직군의 삶에 대해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졌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 내용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실 처음 전략일을 받았을 때는 '꽤 큰 회사의 전략을 짜는 일이니 엄청 발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생각해 보면 업무의 대부분이 Word나 PPT로 보고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요즘 '내 능력, 경쟁력은 뭘까?' 하는 고민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썼던 취업 깡패의 바이블이라는 매거진에서 제가 계속 강조했던 것은 '나만의 차별성을 키워라'였는데 정작 지금 제가 과연 차별성을 키워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Word나 PPT 스킬이 조금 는다고 해서 그것을 경쟁력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친구들을 보면 누구는 애널리스트가 되어 산업 리포트를 쓰기도 하고, 누구는 MD로서 거래선들과 인맥을 트기도 하고, 또 누구는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차근차근 만들어 가고 있어요. 그런데 저 스스로를 보면 '난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 때로는 더 늦기 전에 자신만의 전문성이나 영역을 만들 수 있는 직업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선배들은 스텝 직군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 정의, 해결 및 전달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해요. 여러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문제를 발견해 조율, 해결하고 그것을 경영진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엄청난 능력이라고요. 들어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21세기에는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하다는 소리를 어디서든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회사에서 짤렸을 때 그 능력으로 홀로서기가 가능할까요? 같은 스텝 직군으로의 이직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밥벌이가 가능할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요즘 느끼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이라도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직업을 찾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요즘 누구나 한 번은 건드려 본다는 데이터 사이언스, 코딩 등을 살짝 공부하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장점도 많은데 그중 가장 좋은 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정말 많다는 거예요. 하는 일이 회사 안팎의 정보를 모아 정리하는 일이다 보니 업계 트렌드는 물론 사회문화 트렌드까지 다양한 양질의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아요. 그리고 그 정보들을 가공하면서 여러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 인사이트를 가장 잘 활용한 예가 주식투자이지 않나 싶어요. 코로나가 우한 폐렴으로 불렸을 때부터 회사에서는 바이러스가 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했고 비대면, 온라인 거래, 화상회의, 헬스케어 등이 급부상할 거라는 걸 작년에 거의 확신했었죠. 그리고 이 영향으로 성장할 주식을 고르는데 마침 그때 상장한 Zoom과 유통의 공룡 아마존 등이 그 후보였고 실제로 거기에 투자를 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다들 많이 버셨는데... 전 쫄보라 조금 먹고 나와서 그다지... ㅜㅜ)
또 팀원들 다수가 트렌드, 투자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히 다양한 정보와 각자의 투자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어 투자 인사이트가 생기는 것 같아 좋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회사의 뒷이야기, 비밀 혹은 진실들을 많이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정보가 모이는 만큼 온갖 썰도 모이고 경영진 사이의 일들, 사내 정치 이야기 등이 모이는데 마치 드라마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 소소한 재미가 있어요. 특히 워낙 뉴스에 자주 나오는 회사에 다니다 보니 뉴스에 소개된 내용과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할 때면 마치 제가 무슨 비밀 정보조직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아요.
이런 것들이 스텝 직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당분간은 두 가지에 집중하려 해요. 스텝 직군의 태생적 한계(?)를 좀 벗어나는 방향으로요.
먼저 '홀로서기가 가능한 능력 키우기'에요. 회사가 사라졌을 때 뭐든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특히 조금 장기적인 관점에 앞으로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하고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음은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지지기반을 만드는 거예요. 만약 개발자나 디자이너였다면 비교적 자유롭게 회사를 옮기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었겠지만, 온전히 회사에 귀속된 스텝 직군은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상대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때 정말로 내게 힘이 되어 줄 건 경제력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새로운 도전을 더 자주 하기 위해, 회사가 사라져도 일어설 수 있게, 탄탄한 경제적 지지기반을 만드는 일에 더 힘을 쏟으려 합니다.
대기업 스텝 직군에 대해 다른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제가 느끼는 건 아직까지는 서기관 혹은 PPT 디자이너예요. 그리고 이런 능력이 제 평생을 책임질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하고, 또 더 많이 도전하면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난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