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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호에 맞는 Jan 03. 2024

2. 꼰대 1, MZ 3명인 이상한 TF

생각이 정리가 안 되면 표부터 그려

꼰대 1, MZ 3명인 이상한 TF


먼저 이 TF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TF의 이름은 경쟁전략 시뮬레이션 TF.

이름 그대로 경쟁전략을 분석하고 시뮬레이션하는 TF다.


A업체가 이렇게 공격하면 업계가 어떻게 바뀌고,

B업체가 저렇게 방어하면 시장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시뮬레이션 하는 TF.

대충 이런 류의 소설, 특히 경영진이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그런 TF 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이 경쟁전략 시뮬레이션을 보고서나 엑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만들란다.

단순히 상상이 아닌, 눈에 보이는 War Game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라나?

(심지어 게임 개발자를 고용하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근데 정말 경쟁전략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게임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이 TF의 목표였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영진들의 빠른 의사결정을 돕는 것.

그것이 이 TF의 최종 목표라고 했다.


이 원대하고 거대한 목표를 위해 총 4명이 차출되었다.

차출되었다는 건 다시 말해 자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즉, 이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는 우리 부서의 불문율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 다른 부서도 비슷할 듯 싶다)

- 뜬구름 잡는 목표를 가진 업무나 TF는 피해라

- 스탭 부서에서 프로그램, 시스템 같은 거 개발하는 업무는 절대 하면 안 된다

- 경영, 전략, 경쟁 등의 단어가 들어간 부서나 업무는 피해라


경쟁전략 시뮬레이션 TF는 딱 이 조건에 맞는 TF였다.

즉, 결코 발 담궈서는 안 되는 TF였던 것이다.


나 역시 차출되지 않으려 갖은 수단을 썼으나... 한낱 어린 양인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을까.

부서장의 "가라"라 한 마디에 "네에...." 하며 차출되었다.

그리고 나 외에도 이렇게 차출된 사람은 총 3명이었다.

TF원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TF 구성원>

- 왕 부장 : 50대, 남자, 꼰대, ISTJ

- 최 과장 : 30대 중반, 여자, 독서를 좋아함, ISFP

- 천 대리(나): 30대 초반, 남자, 슬럼프 살짝 겪는 중, ENTJ

- 김 대리 : 30대 초반, 남자, 모난 성격을 고치는 중, INTP


아름답지 않은가?

마치 바빌론의 탑처럼 우뚝 솟은 50대 부장님과 그걸 받쳐주는 30대 초중반 MZ 사원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이 기괴하고 위태로운 구조의 TF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 TF 구성원들을 본 왕 부장의 첫 마디는 이거였다.


"XX, 내가 달란 애들은 하나도 안 주고 핏덩이들만 줬네."


얘기를 들어보니 왕 부장은 최소 차장, 과장급들만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생각은 TF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타부서와의 협업이 가장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직급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걸 대놓고 우리 앞에서 얘기하니 좀 그렇긴 했다.


"딴 부서 노인네들이 잘도 이런 애들 말 들어주겠다. XX, 나더러 어쩌란 거냐."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 왕 부장은 한참을 더 욕을 하며 툴툴 거렸다.

그런 그 앞에서 나머지 TF원들은 말 없이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시 뒤, 화가 좀 진정됐는지 왕 부장이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네, 왜 이 TF가 이 멤버로 구성됐는지 알겠냐?"



생각 정리가 안 되면 표부터 그려 봐


왕 부장이 우리를 쭉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근데 너네, 왜 이 TF가 이 멤버로 구성됐는지 알겠냐?"

"네? 글쎄요...."

"글쎄요만 하지 말고. 한 명 씩 대답해봐바. 최 과장?"


그가 조용히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최 과장에게 물었다.

최 과장은 순간 멈칫하며 생각하고는 답했다.


"음... 원하신 차/과장급 고참들은 현업이 바빠서?"

"나, 참.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네. 근데 이거 대표이사가 시킨 중요한 일이라며? 근데 왜 고참들을 안 줘?"

"글쎄요...."


왕 부장은 최 과장에게 심문하듯이 물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게... 이게 중요하긴 한데 당장 발등에 불떨어진 일이 아니라서요?"

"그것도 맞긴 하지. 근데 최 과장 대답이랑 똑같잖아?“

“그...렇죠.”


우리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김 대리. 넌 어때? 앞에 둘이 한 얘기랑 똑같은 소리하지 말고.“

“음... 근데 이거 꼭 이렇게 심문하듯이 물어보셔야 돼요? 그냥 답을 알려주면 안 돼요?”

“아니, 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뭘 것 같냐고!”

“앞에 두 사람이랑 똑같아요! 모르겠으니까 그냥 답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으... 어휴. 내 팔자야.”


김 대리 특유의 성격 탓에 왕 부장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몇 대 쿵쿵 때린 뒤 말을 이었다.


“너네 앞으로 나랑 일하면서 많이 배워야겠다.”

“....”

“어휴. 자, 앞으로 생각하기 전에 표부터 그리고 시작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손수 마커를 집어들고는 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중요도와 시급성의 높고 낮음을 놓고 나누면 이렇게 되지.“



표를 완성한 뒤 왕 부장이 말을 이었다.


"자, 여기서 에이스나 고참들은 어디에 배치할까?"

“당연히... 중요도가 높고 시급성이 높은 곳이겠죠?”




“그래. 이것도 못 맞추면 등신이지. 그럼 중요도는 낮은데 시급성이 높은 일. 여기는?”

“음... 쥬니어들?”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왕 부장이 다시 한 숨을 쉬며 말했다.


“후. 그건 반만 아는 거야. 쥬니어도 투입되지만 결국 진짜 급한 일에는 에이스나 고참들을 투입해. 왜? 당장 결과가 나와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죽어나가는 거야. 중요하건 말건 급한 건 다 걔네가 하니까.

“아아.”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부서 에이스 선배들은 매일 같은 야근에 시달렸다.



“윗사람들은 결국 잘하는 놈들만 찾게 되어 있어. 당연하겠지. 당장 급한 걸 믿을 수 있는 사람 시키는 거. 자, 그럼 이 TF 일은 여기서 어디에 속할까? 힌트 다 줬다.”

“중요도는 높은데 시급성은 낮은 곳?”

“그래.”


왕 부장이 칠판에 빨간 네모를 치며 말을 이었다.




“중요는 해. 대표이사부터 내려온 일이니까. 근데 당장 결과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야. 이런 일에 에이스를 투입할 리가 없지. 당장 급한 일 쳐내느라 죽어나는 애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보내겠어?

“그래서....”

“그래.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서에서 중요도가 낮은 너희 쥬니어들이 뽑힌 거야. 당장 급한 건 선배들이 해야 하니까. 뭐...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좀 꺼림직하기는 했다.

결국 에이스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방패막이로 썼다는 뜻이니 말이다.

뭐... 이게 회사 생활이긴 하지만.


그러던 그때, 김 대리가 인상을 쓰며 왕 부장에게 물었다.


“근데 부장님은 왜 TF에 차출된 거예요? 나름 일 잘하시는 편인데.”

“왜겠냐?”

“윗사람이 보기에는 일잘러가 아니라서?”

“확, 씨!”


김 대리의 필터링 없는 대답에 왕 부장은 발끈했다.

그러다 다시 한 숨을 쉬고는 말했다.


“후, 이거 안 보여? 이거.”


툭툭


그가 표 위에 있는 ‘중요도’라는 단어를 툭툭치며 말을 이었다.


“대표이사가 중요하다고 했다며. 근데 거기에 쥬니어들만 보냈다는 얘기 돌아봐. 팀장 모가지가 남아 나겠냐. 그러니 TF장에 나같은 부장급을 갖다 앉힌 거지. 구색 맞추기야. 구색 맞추기.“

“아아.”


이제야 이 기형적인 TF 구성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중요는 하지만 당장 급한 일은 아닌 일.

이런 일에 에이스/고참들의 전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중요한 만큼 아무나에게는 맡길 수 없다.

그래서 책임자는 고참 부장으로, 실무는 쥬니어들을 뽑은 것이다.


우리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왕 부장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는손으로 표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뭔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표를 그려서 생각해봐. 이렇게 구조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이 되어 있어야 일 잘한다는 소리 들으니까."

"오...."

"오는 개뿔. 앞으로 나랑 얘기할 때 했던 말 또 하고 빙빙 돌면 가만 안 둘 거다. 알았어?"

"네에...."


결국 이 대화는 호통으로 끝났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뭔가 생각할 거리는 있는 대화임에는 분명했다.


'구조적으로 생각한다라.'


이때 처음으로 왕 부장에게 뭔가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배운 점 : 구조적 사고


구조적 사고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기본이다.

생각을 할 때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기준과 분류 방법은 먼저 정한 후 그에 맞게 분류하며 정리하는 것.

이것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의 가장 기본이다.


사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고, 업무를 하며 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준과 분류 방법을 정하기도 전에 생각부터 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며 생각을 이어나간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의미없는 생각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려 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의미없다고 생각한 그 생각에 다시 빠져들고 만다.


이걸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구조적 사고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이걸 막기 위해선 먼저 기준과 분류 방법부터 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걸 표, 그래프, 그림 등으로 만들어 명확하게 만든 뒤 생각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고 했던 생각을 또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명심하자.


생각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표부터 그린다!

<참고 도서>

- 맥킨지 논리력 수업

- 거인의 노트


*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등장인물이나 회사 이야기는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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