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최근에 읽은 책 ‘인포메이션'에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 거기에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왜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이 되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었다.
물리학자들이 꼽는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이 책에선 단순히 양자역학의 발전과정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정치, 역사, 종교, 철학에 대한 고찰도 상세하게 드러난다. 한마디 한마디가 쉽지 않았지만, 중요한 말들은 손으로 써가며 곱씹어 이해를 해보았다. 여기서 언급되는 양자역학에 대한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과 관련된 수많은 고찰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이 명작으로 언급되는 이유가 아닐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서의 문과, 이과로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러한 교육과정의 결과물로서 이공계라면 수학과 과학, 그리고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가장 ‘이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그 과정은 굉장히 ‘문과적'이다. 세상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윤리적 판단을 하기도 하며, 칸트철학과의 연관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
관심 있었던 수학, 컴퓨터과학, 자연과학을 제외한 세상 모든 갈등이나 문제, 생각 들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관심하도록 교육받아왔고, 그것을 충실히 따르기만 했던 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능력인 ‘세상에 대한 통찰’은 역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듯하다.
나의 과학적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서 양자역학의 발전과정을 온전히 함께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읽을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제공해주는 책이었다.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해본 뒤 읽는다면 더 재미있으리라.
우리는 ‘사물'을 직접 지각하지 못하고 우선 지각 대상을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로부터 개념을 만들어 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각적 지각을 통해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밀려 들어오는 것은 무질서하게 섞인 다양한 인상들이다. 표상을 통해 감각적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정리를 한다. 즉, 인상을 표상으로 바꾼다. (서로 연관된 ‘의미 있는 상'으로 바꾼다.)
‘지각'활동이란 개별적인 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지각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비슷한 맥락의 사고를 이전에 한 적이 있는데, 눈 앞에 있는 사과가 빨간색이라고 느끼는 것은 사과가 빛을 반사하여 우리의 시각을 담당하는 신경이 그 빛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빨간색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해'란 일반적으로 수많은 현상을 통합적으로 연관시킬 수 있는, '포괄할 수 있는' 표상이나 개념을 갖게 된다는 뜻. 즉, 많은 것을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이 이해이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의 연관성을 통찰한다는 의미이다. 많은 경험적 사실들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단순한 근원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공통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더 간단하고 통합할 수 있는 원리가 나올 수 도 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볼프강이 언급한 말인데, 나에게 가장 납득되었던 말이다. 이러한 이해가 공통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볼프강이 또 언급했듯이, 미래에 더 간단하고 통합할 수 있는 원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가 발견한 지식 중에 자연에 대해 절대적인 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현재로선 최선으로 보일지라도 먼 미래에 같은 현상에 대해 더 간단하며 통합할 수 있는 원리가 나올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뉴턴 역학이 고전 물리학의 범위 내에서는 공통의 원리이며, ‘이해' 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강연에서 한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았으며, 사변이다'라는 말이 적힌 쪽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이 물리학자가 논리적으로 아인슈타인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과 과학분야에서 까지 이렇게 악의적인 정치적 열정이 감염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가 아닌,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과학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맞는 말이다. ‘패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영국은 패자가 깨끗하게 인정하고 승자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뛰어난 덕목이라고 여겨진다. 반면에 ‘독일'은 패배자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승자를 더 추앙한다. 여기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분명 수 없이 만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의견이 아니라 상대의 의견이 더 합리적이고 옳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영국의 ‘패배'에 대한 태도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과 파동역학이 충돌한다.
아인슈타인 曰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베르너는 '전자 궤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전자 궤도는 관찰할 수 없다. 다만, 전자가 놓여있는 불확정적인 위치에 대한 불연속적인 결과만 지각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 한 전자가 대략적으로 주어진 위치에 놓여있는 동시에, 대략적으로 주어진 속도를 갖는 상황을 묘사할 수 있을까? 를 고민.
불확정성의 특징을 갖는 위치와 운동량의 곱은 플랑크의 작용 양자보다 작을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서 현상을 완벽하게 규정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결정요소들을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치 않으려고 함. (like 상대성원리 반박한 사람들처럼) 왜냐하면 확고한 법칙으로 돌아가는 객관적인 물리학에 삶을 바친 사람이라 자신의 기반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어 曰 '신이 어떻게 세계를 다스릴지 신에게 제시해주는 것도 우리의 과제는 아닌 듯합니다.'
불확정성 원리의 탄생 과정에 대한 묘사를 다룬다. 불확정성 원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됐는데 정작 불확정성 원리는 간결하게 묘사를 한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도 상당히 관여가 되어 있었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한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런 점에서 과학이 과학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철학과 깊은 연관이 되어있는 것 같다.
'객관', '주관'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우리의 '동시적'이라는 개념은 객관적이라고 느껴졌지만, 상대적 이론을 통해 주관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지해 있는 관찰자에게는 동시적으로 느껴질 두 사건이 움직이는 관찰자에게는 꼭 동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은 모든 관찰자가 특정 다른 사람이 무엇을 지각할지 또는 지각했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주관을 나누는 것은 필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누는 위치는 관찰 방식에 달려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정해질 수도 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물리학적 사실은 객관적이면서 주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판단하는 객관과 주관의 구별법이 주관적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있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주관적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니 ‘생각에 관한 생각'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 자신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한다. 근데 번역본이 별로라고 해서..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
- 실용주의자 曰 어떤 것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다. 자연을 관찰할 뿐이고, 그것을 취급하기 위한 실질적인 규정에 불과하다.
- 새로운 이론은 이전 이론을 개선한 것일 뿐이다. ( 뉴턴 역학 → 상대성이론 역학 )
- 베르너 曰 '개선'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은 그것이 적용되는 분야 내에서는 완결성을 갖는다.
- 실용주의자 曰 물리학의 어떤 분야를 완결된 분야라 하는가?
- 베르너 曰 모순 없는 공리를 통해 모든 케이스의 경험을 진술할 수 있는 이론을 말한다. 현재는 뉴턴 역학, 통계적 열 이론, 맥스웰의 전자기학 및 특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있다. ( 과연 그럴까? 베르너의 착각이 아닐까. )
- 실용주의자 曰 왜 진보가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왜 이것을 중요시하나? ( 뉴턴 역학 →(불연속)→ 양자역학 )
- 베르너 曰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생각하고, 이전의 것에 계속 덧붙이는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면 과학에서의 엄격함을 앗아간다. 이것은 정확한 과학이 될 수 없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연관'을 조망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럼 자연의 법칙인 '단순성'을 잃을 것이다.
- 실험으로 인한 결과를 공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공리로 확정될 상당히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날 땐 아주 다르다.
이 부분에서는 베르너에게 내가 상당히 설득되었다. 실용주의자의 질문들을 보면서 ‘그러게, 새로운 이론은 그 전 이론을 개선한 거지. 근데 왜 개선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베르너의 생각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니, 이해가 되었다. 과학에서는 ‘상당히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 이 굉장히 중요하다. 베르너는 자연은 기본적으로 단순하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므로 ‘상당히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나면 공리로 확정될 수 도 있으므로 주목을 해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성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자연은 단순하고 신비한 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은 아직 우리가 그 단순함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폴 曰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은 것으로 여긴다는 뜻.
베르너 曰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는 없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밖에 없어." 이것의 의미는 한 가지 어려움을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난다는 뜻이다.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어려움들까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닐슨 曰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잘못된 주장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폴과 베르너의 주장들은 얼핏 봤을 때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상보적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닐슨이 한 말이 굉장히 멋들어졌다. 멋지다.
- 기존 고전 물리학에서는 매 순간에 자연의 객관적인 상태가 존재하고, 그로부터 다음 순간의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아인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요소이고 발견되어 현상을 객관적이고 완벽하게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관찰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 사건이 목적을 통해 결정된다. 즉, 지향하는 목표를 통해. ( 생명, 호흡, 치유 과정 )
- 사건이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상황(사건)을 통해 결정된다. ( 물리학적/화학적 용어로 신경전도를 설명하는 것. 인과적 진행 )
-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면서 서로를 보완을 한다. 즉, 둘 다 맞다.
관찰에 대한 고찰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과적 관찰로 불확정성 원리를 바라봤기 때문에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
종교의 언어에 명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포기한다.
자연과학은 훗날 명백한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과 희망을 갖고 있다.
"설거지는 언어와 똑같군요. 물도 더럽고 행주도 더럽지만, 결국 이걸로 접시와 컵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니까. 언어도 개념이 불명확하고 논리가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자연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베르너 曰 "전복시키는 것보다 기존 것을 유지하되, 중요한 목표로 범위를 좁혀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불가피하게 바꿔야 했던 그 작은 것도 두고두고 영향력을 미쳐서 삶의 모든 영역이 저절로 바뀌게 될 것이다."
혁명운동을 하는 젊은 대학생에게 베르너가 해준 말이다. 혁명이라 함은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바꾸게 되면 그것이 두고두고 영향력을 미쳐서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방법이 뒤엎는 것보다 더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혁명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인 듯하다. 혁명의 대상을 개발자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면 개발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말이 될 듯하다.
삶의 모든 근심들, 그는 그것을 던져버리고
이젠 걱정도, 염려도 없이
운명에 용감하게 맞선다.
오늘 안되면 내일은 되리.
내일 되는 거라면, 우리 오늘은
남아 있는 소중한 시간을 음미하자.
가장 와 닿았던 문장은 끝 두 문장이다. 사람들은 불필요한 걱정을 많이 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결정적인 발견을 한 개인에게 그런 발견을 할 수도 있었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을 발명을 한 과학자들에 대한 책임에 대해 얘기한 부분에서 베르너가 한 말이다. 물론 원자폭탄을 직접적으로 발명한 과학자들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근원 기술인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한 과학자는 ‘오토 한’이다. 베르너의 말의 핵심은 이 ‘오토 한'이라는 과학자를 이 발견을 할 수도 있었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오토 한이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분명 수년 내로 발견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토 한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조망하기 힘든 여러 이해관계가 객관적 목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재건에 대해 독일 정부와 논의하던 중에 베르너가 한 말이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 있는데,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합리적이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다양한 이해관계가 섞여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실험에서 예기치 않던 단순함이 드러날 때면 자연스럽게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전에 언급했듯이 자연은 단순함을 갖고 있다. 이런 경우 자연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고, 현인들에게만 말하라. 대중은 금방 비웃어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