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시 짓다
'왜 하필이면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어머니의 곡소리가 거실을 메울 때마다 내 마음의 기둥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죄스러움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호르몬 치료(HRT)를 시작한 지 한 달. 아버지는 나에게 '단전'과 '단수'를 통보하셨다. 즉, 모든 금전적 지원을 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네가 그 길을 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너의 부모가 되어줄 수 없다"는, 가장 무서운 파문(破門) 선언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생존을 위한 견적서를 뽑아야 했다.
계산이 섰다. 졸업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학위를 따면 주7일을 근무해서라도 갚으면 된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인데, 이 정도 시련은 수업료라고 생각하자고.
하지만 마음의 계산은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난 후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째 되던 날, 나는 미리 연락을 드린 후 사과(Apple)를 사 들고 아버지께 향했다. 죄송하다는 의미(Apology)를 담은, 나름의 화해 제스처였다.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일 바쁘니 오지 마라. 다음에 와라." 전화를 끊고 목놓아 30분을 울었다. 사과 봉지가 무겁게 손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날 확신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내 사랑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구나. 내가 아들이 아니라면, 나는 버려지는구나.'
그렇게 나는 부모님 없는 고아처럼, 스스로 독립문을 세우고 홀로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갔다. 외로웠지만 행복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머리 묶는 법을 찾았고, 예쁜 목소리를 얻었고, 얼굴은 점차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변해갔으니까. 부모님의 부재로 생긴 구멍은 '나 자신'으로 채우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수술을 한 달 앞두고,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날부터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매일 밤 전화를 걸어 나를 설득하셨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애원 섞인 목소리는 나를 흔들기 위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수술 예정인 병원까지 찾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다. 두 분이 내 수술을 물리적으로라도 막으려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후의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술비를 전액 현금으로 인출하는 것이었다. 계좌가 묶이거나 카드가 정지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나는 수천만 원이 든 두툼한 봉투를 마치 내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 돈은 내 품 안에 있어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지폐 뭉치가 아니었다. 내 새로운 삶을 지어 올릴 유일한 금줄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곁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일주일 밤낮으로 간호해 주셨다.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냐"며 우시면서도, 내 땀을 닦아주셨다. 일주일 후에는 아버지께서 찾아오셨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보시더니,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한 '부모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수술비를 현금으로 품에 안고 전전긍긍하던 그 때, 아버지는 내 수술비를 대신 내주려 하셨다고 한다. 내가 이미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선결제를 해버려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돈을 뺏길까 봐 품에 숨겼는데, 아버지는 그 돈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셨던 것이다.
몸이 좀 회복된 후, 나는 부모님과 마주 앉아 물었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왜 용돈 끊고, 병원까지 찾아가시고… 저를 미워하셨잖아요."
부모님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무서우셨던 거다. 금전 지원을 끊으면 내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포기할 줄 아셨다고 했다. 병원에 찾아간 것도 어떻게든 자식을 말려보고 싶은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트랜지션이라는 길이 너무 험난하니까, 나중에 후회할까 봐, 내 인생이 망가질까 봐,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나를 막아서신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끝내 수술을 받고, 되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자 두 분은 인정하신 것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내 자식이 선택한 길이라면, 우리가 지켜줘야겠구나."
수술 후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하루가 멀다고 아버지와 통화하며 애교를 부리는 딸이 되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병원을 알아보고 모시고 간다.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애틋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고 했던가. 트랜지션이라는 거친 폭풍이 우리 가족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지붕이 날아가고 기둥이 흔들렸지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비가 그치자 땅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굳었다.
나는 이제 안다. 그때 아버지가 닫아걸었던 문은 나를 내쫓기 위한 문이 아니라, 가시밭으로 나가려는 자식을 보호하고 싶었던 '방화문'이었음을. 내가 품에 안고 경계했던 그 현금 뭉치보다, 아버지의 진심이 더 무거운 사랑이었음을. 비록 그 방식이 서툴러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결국 우리는 그 문을 열고 다시 만났다.
나의 독립문은 홀로 서기 위해 세운 문이었지만, 이제는 부모님을 내 세상으로 초대하는 환영의 아치가 되었다. 존경하고 사랑해요, 엄마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