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리는 올해 다섯 살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아직 한국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유치원 갈 때 빼고는 집에서 늘 엄마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아이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랐어도 부모와 주로 모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치원이나 학교에 처음 적응할 때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제법 많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캐나다 아이들과 유학생 아이들을 한데 섞어 EAL (English as an Additional Language) 수업을 제공하기도 한단다. 기특하게도 태리는 아직까지 큰 어려움 없이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익혔다. 어렸을 때부터 데이케어에 다니면서 영어를 쓰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기도 했고 아빠가 영어 책을 많이 읽어준 덕분이기도 하리라.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줄 때 나는 언제나 선생님과 영어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태리야, 좋은 하루 보내. Have a good day!" 하면서 영어와 한국어를 반반씩 섞어서 사용한다. 그런데 올해 새 유치원으로 옮기고 언제부턴가 태리가 나에게 유치원에서는 한국어를 절대 쓰지 말라는 것이다. "Mama, don't speak 한국말! Okay?" 아침마다 차에 타기가 무섭게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그러다 말거니 했는데 점점 강도가 더 세지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누가 한국말 쓴다고 놀렸나,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뭔가 다르다고 느꼈나, 아니면 후줄근한 엄마가 한국말하는 게 부끄러운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에 태리를 바래다주면서 영어로 인사를 하고 내가 무의적으로 그만 "안뇽~"해 버렸다. 순간 나도 아차 싶었는데 태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날 집에 와서는 정말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I said do not speak 한국말, but you keep saying 한국말! That makes me so upset." 하면서 악을 쓰며 우는데 한편으로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캐나다 엄마들과 달라서 한국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내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한국어 쓰지 말라는 요구가 옷도 바꿔 입어라, 머리카락 색깔도 바꿔라가 되기는 얼마나 쉽겠나. 아무리 다섯 살 아이의 투정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고 서럽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유치원 가는 길 운전하면서조차 갑자기 바뀌는 신호등에 "엄마야!" 대신 "Oops!"를 남발하는 웃픈 신세가 되었지만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일종의) 세뇌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태리야, 다른 나라 말을 하는 거는 슈퍼 파워 같은 거야!" "태리네 유치원 선생님들도 집에 가면 다른 말 써." "아빠는 영어, 한국어 두 개 할 수 있고, 엄마는 영어, 한국어, 중국어 세 개나 할 수 있어. 멋있지?" "어머, 걔는 영어밖에 못하나 보구나." 그리고 한국에 가면 태리가 좋아하는 레고 랜드도 있고 대장금이 사는 멋진 궁궐도 있고 엄청 좋다고 한국에 대한 환상을 주입시켰다. 엄마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리의 한국어 금지령은 여전했고 나는 도대체 왜 한국어를 쓰지 말라고 하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하고 조급해져갔다.
한두 달이 지났을까 유치원 선생님과 일 년에 한 번 있는 면담 통화를 했는데 드디어 그 비밀이 풀렸다. 태리네 반 선생님 세 분 중 한국인이신 키나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는데 처음에는 영어로 대화를 했다. "Taeri has a great leadership skill and he is very funny, smart and popular." 그동안 한국인이 신줄 짐작은 했지만 태리가 하도 한국말을 하지 말라는 통에 한국어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 때다 싶어 "Would you mind if I speak Korean to you? (한국어로 말해도 괜찮을까요?)" 하고 여쭤보니 너무 놀라고 반가워하시는 거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태리가 "My mom speaks Chinese."라고 해서 내가 중국 사람인 줄 알았단다. (세뇌 교육의 부작용이다) 선생님께 그 간의 고민을 말씀드리니 "아~ 태리 어머니, 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하시는 거다.
태리네 반에 올해 킨더가든 입학을 앞둔 한국인 친구가 두 명 더 있는데 영어가 통 늘지를 않아 부모님들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입학 전에 영어를 배우라고 유치원에 보냈는데 한국인 친구를 만나 하루 종일 한국말만 쓰고 오는 것 같다고 유치원에서는 한국말을 못 쓰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단다. 그래서 아이들이 한국말을 쓰면 선생님 세 분이 입을 맞춰서 "Do not speak 한국말." 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태리는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옆에서 듣고 아차 싶었으리라. 그리고 엄마에게 한국어를 절대로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리라. 키나 선생님은 말을 마친 뒤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 태리가 한국어를 할 줄 아나요?" 암요, 암요. 태리는 청산유수입니다. 선생님은 의도치 않게 한국말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심어 주었을 수도 있었겠다며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말씀으로 통화를 마쳤고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태리가 그동안 얼마나 조심하려고 신경을 썼을지, 한국말 쓰지 말라는 선생님들 앞에서 자꾸 한국말 쓰는 엄마를 보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을지, 아빠를 닮은 찐 FM 인증을 해 버린 우리 태리가 웃기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집집마다 영어와 한국어 (또는 다른 언어)를 대하는 여러 가지 모양들을 보게 된다. 어차피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해야 하니 아이에게 영어만 쓰게 하는 집, 영어만 할 줄 알면 사춘기 때 부모와 단절되기 쉬우니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게 하는 집 (형제자매끼리 영어로 대화해서 부모에게 주의를 받는 경우도 보았다), 부모는 영어가 더 편하지만 자녀가 한국어를 잘하길 바래서 집에서 일부러 한국어만 쓰는 집, 집이나 직장 모두 거의 한국어만 사용하는 집, 한국인 아빠에게는 한국어만 일본인 엄마에게는 일본어만 쓰는 집, 영어 한국어 둘 다 자유롭게 사용하는 집 (과연 있을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태리가 커서도 모국어인 한국어로 거리낌 없이 부모와 대화하고 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러면서 영어로 교육을 받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자연스러운, 자유로운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