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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처음 Mar 20. 2019

사랑하는 안드레아

열여덟 살 사람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

작년에 우연한 기회로 참석했던 영화 <어른이 되면> 시사회를 통해 유투버 생각 많은 둘째 언니로 활동하는 장혜영 작가이자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 이 책 <사랑하는 안드레아>라는 책을 알게 됐다. 타이완 문화부 장관을 지낸 작가이자 비평가인 룽잉타이가 어느덧 훌쩍 자라 버린 고등학생 아들 안드레아와 떨어져 살면서 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 정도의 간략한 소개만으로도 나에게는 읽어봐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있지도 않은 아이와 소통하고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을 이미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이 아들 안드레아, 오른쪽이 룽잉타이

부모님이 한국에 살다가 세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첫째만 빼고 둘째와 셋째는 둘 다 한국어를 아예 할 줄 모르고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이민자로 맘고생을 하면서 큰 까닭에 아예 부모님과 대화도 섞지 않는 동생들을 둔 지인의 경험담, 어렸을 때 재일교포 3세와 결혼을 해서 일본에서 재일교포 아이셋을 키운 우리 이모의 삶 등 내가 겪지 못한 삶을 겪는 아이들과 온전하게 교감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들게 하는 주변의 경험담을 많이 들어왔었다. 하물며,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어떤가. 나라는 존재를 부모님의 기대하는 나와 떨어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반항하고 저항했다. 아마 착한 딸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라서 이 책에 더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둘의 편지가 부모와 또는 자식과 소통을 간절하게 원했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어렵다고 느꼈던 중년의 자식들이 공감의 편지를 보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만큼 어려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룽잉타이는 독일과 스위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다가 1999년에 타이완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어금니도 나기 전부터 독일에서 자란 아들과는 아들의 청소년기부터 떨어져서 지냈다. 그 무렵 룽잉타이는 아들이 낯설고 도무지 대화를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엄청난 공포감과 이 사람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둘의 모국어가 달랐기 때문에 편지는 그 둘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룽잉타이는 중국어가 제일 편했고 안드레아는 독일어가 제일 편했다. 그렇기에 이들의 모든 글은 다음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안드레아는 영어로 편지를 썼다.

룽잉타이는 안드레아가 쓴 편지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룽잉타이는 영어로 답신했다.

룽잉타이의 영어 편지는 중국어로 한 번 더 썼다. 번역하지 않고 아예 다시 썼다. 왜냐하면 번역이 오히려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번역가로서 이 부분에 엄청나게 공감했다. 그리고 룽잉타이가 아들의 편지를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여 번역하기 위해 국제전화로 여러 차례 토론을 나누었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이 과정이 둘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했겠구나!’ 왜냐하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할 때에는, 그냥 외국어 글을 마음속으로 읽어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파고들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뜻을 오역하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놓치거나 불필요한 내용을 더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사진인데 마지막 페이지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는 부모와 자식 간 세대차이, 대륙 간 문화 차이, 연애 이야기, 민족주의와 시대적 사명, 정의와 도덕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를 오고 간다. 이 와중에도 중간중간 코믹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 있는데, 예를 들어 안드레아의 편지에 나온 ‘섹스, 쾌락, 로큰콜’이란 말이나 ‘엑스터시’라는 단어에 과민하게 반응하여 새벽 시간에 메신저로 말을 거는 엄마의 모습과 ‘엄마, 제발요. Don't panic!’ 느낌의 아들의 반응은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든다. 공감에서 나오는 웃음일 것이다.


물론, 안드레아가 엄마의 취향과 모성애를 짖궂게도 ‘키치 중의 키치’라고 깎아내렸을 때에는 책을 덮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세계의 주인이며 나의 견고한 세계와 취향은 완벽하다고 느끼는 20살 초반 사람의 치기 어린 당당함에 시고 떫은 덜 익은 귤을 먹은 것처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언젠가 내가 낳은 아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겠지. 책을 읽으며 마이크 밀스 감독의 <우리의 20세기(원제: 20th Century Women)>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이크 밀스 감독 영화 <우리의 20세기> 포스터 / 출처: DAUM 영화


이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두 콜라보레이터가 쓴 서문의 일부를 공유하고 싶다. 이 두 사람이 쓰는 언어의 결이 얼마나 다른 지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나서야 문득 이 일이 더욱더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렸어요. 바로 제가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거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엄마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아갈 ‘소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것을 제가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사랑하는 안드레아, p.14
앞으로의 삶의 여정에서도 당연히 각자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 것이다. 인생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3년 동안 바다 위 수기신호로 별을 응시했고, 달을 만끽했다. 뭘 더 욕심을 부리겠는가? -사랑하는 안드레아, p.12


책 속 안드레아보다는 나이가 많고 책 속 룽잉타이보다는 어린 내가 중간자의 입장에서 둘의 대화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세월이 흘러 내가 책 속 룽잉타이 나이 쯤 됐을 때는 이 책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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