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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은 Aug 12. 2021

백만번이라도 기다릴게,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7살 인어공주 유예린이야기

 에리얼은 마녀 우르슐라에게 찾아가 '지느러미 대신 다리를 갖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빌었다. 우르슐라는 에리얼에게 다리를 만들어주었고, 대신 목소리를 가져갔다. 나는 만화영화를 보다 "아빠, 내 목소리도 누가 가져간 걸까?"라고 물었다. 아빠는 "그러게, 바다 나라로 가서 찾아와야겠다."라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아빠가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이 조개껍데기 안에는 예린이 목소리가 갇혀있어."


 "에, 인어공주처럼?"


 "맞아, 예린이는 집 밖만 나가면 목소리를 잃어버리잖아. 그때, 요 목걸이를 달칵하고 열면 예린이 목소리가 스르륵 돌아와."


 "정말 예쁘다."


 "공주 맘에 든다니 좋다. 예린이 생일 축하해."


 나는 조심스레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열었다. 내 이름이랑 아빠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예린아, 길을 잃어버리면 가까운 파출소에 가서, 경찰 아저씨한테 이 목걸이를 보여줘. 말 못 해서 아빠 잃어버리고, 못 찾으면 안 되잖아."


 "이렇게?"


 "응. 아빠는 예린이 없으면 못살아."


 "알겠어."


 아빠는 내가 말을 못 하니까, 걱정이 많다. 우리는 이렇게 자주 역할놀이를 한다.

 

아빠는 미용사다. 아침마다 내 머리를 예쁘게 매만지고 반짝거리는 핀을 달아주신다. 난 아빠가 제일 좋다. 아빠가 '인사해야지'할 때, 나도 예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인사하겠다고 매번 진심으로 약속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닿으면 나는 자꾸 움츠러들고 식은땀이 난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했다. 


 원래 말을 못 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5살 때까지는 노래도 잘 부르고, 친구랑 장난치다 보면 소리 지를 크게 내서 혼난 적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먼 곳으로 떠나셨다. 정말로 엄마가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다니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날 때, 자기 전에, 한 달도 넘게 울었다. 처음에는 할머니도 위로해주셨지만 할머니도 힘들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고만 울어라, 고만 울어라. 나도 울고 싶다.' 하셨다. 그렇지만, 고만 울겠다고 만날 다짐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서 정말 속상했다. 울 것 같으면 나는 손톱 밑을 뜯었고, 손톱을 먹기도 했다. 손톱에서 피가 났다. 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다. 아마 내 기도는 하느님보다는 우르슐라 마녀가 들어준 거 같다. 마녀는 나를 그만 울게 해 줬지만, 목소리는 가져가 버렸으니까. 결국 나는 아빠랑 할머니를 빼고는 아무한테도 말을 못 하는 신세다.




"다음 주가 벌써 공연 보러 가는 날이네요.  손잡고 다닐 짝꿍을 정해 줄게요."

 까치반 선생님이 다정하게 말하셨다.


"저는 예린이랑 손잡고 싶어요."

 시우가 손들고 말했다.


 "예린이도 좋아?"

 시우가 물었다.


 "예린이 좋으면 끄덕끄덕해볼래? 옳지."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나는 몸이 배배 꼬였다. 목을 겨우 까닥였다. 나도 시우가 좋다. 시우는 왕자님 같다. 잘생기고, 밥도 잘 먹는다. 그리고 우리 아빠처럼 친절하다. 시우랑 같이 가는 소풍은 솜사탕을 먹는 것보다 좋다.


 공연 날이 되었다. 나는 버스에 타기 부끄러워서 괜히 할머니 얼굴을 만지고, 다리 뒤로 숨는 장난을 쳤다. 겨우 버스에 올랐을 때는 버스가 맨 뒷자리 빼고는 꽉 찼다.


 "예린아, 나 어제 소풍 간다고 잠이 하나도 안 와서, 엄마한테 혼났어."

 시우는 정말 엉뚱하다.


 "오늘 도시락 빨리 먹고 싶어. 너도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배시시 웃었다. 시우는 가방에 있는 과자를 자랑하다가 잠이 들었다. 나도 내 과자들을 보여주다가, 시우가 잠들 것을 보고 약간 김이 샜다. 대신 바깥 풍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씽씽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어머, 차가 막혀서 어린이 공연 시간이 늦겠어요."

 맨 뒷자리에 앉으신 선생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빨리 가겠지만 시간 맞추기 어렵겠대요."

 까치반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재잘재잘 친구들 목소리 사이로 "최대한 빨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공연을 못 보지는 않을까? 마음이 콩닥콩닥거렸다. 시우는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잔다.


 '시우야, 우리 공연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버스가 멈췄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 늦었어요. 장난치지 말고, 선생님 따라서 잘 내려요."

 선생님은 안전벨트를 풀러 주시며 곤히 잠든 시우를 깨웠다.

 

"시우야, 가자. 예린이 손 잡아요."


 "네."


 "아이고, 의젓하네."


 "선생님, 얼른 내리고 싶어요."

 

"그래, 조심히 내려요."


 시우는 친구들이 내리는 줄을 기다리다 지쳐 살짝 기대앉더니, 스르륵 누워 다시 잠이 들었다. 시우는 너무나 졸린지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다 내렸지요?"

 선생님이 소리치셨고,


 "네!"

 하는 친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아니요'하고 싶었지만, 내 목과 입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가, 할머니가 발라주신 매니큐어가 부드럽게 닿아 '아차' 하고 손을 뗐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중간쯤 오셔서 자리를 확인하실 때라도 걸어 나가 선생님 옷자락을 잡아보려 했지만, 아저씨는 내가 뒤에 있다는 걸 모르시는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이 멀어지더니 차에서 내려버리셨다. 차 문이 닫히고 난 뒤에는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말로 무서워졌다.




 시우가 눈을 뜬 건 송골송골 맺힌 머리카락의 땀이 똑 떨어질 때쯤이었다. 두리번두리번 앞뒤를 확인한 시우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답을 해줄 수 없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우는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울다 보니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너무 더워서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문을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시우는 창 밖을 탁탁 쳤다. 주차장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예린아. 괜찮아. 친구들이 연극 보고 밥 먹고 올 때까지 기다리자." 

 빨갛게 볼이 달아오른 시우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시우는 다시 조금 울다가 눈을 감았다. 하도 더워서 그러는 걸까? 꿈꾸는 것처럼 나도 눈이 감겼다.


 "예린아, 우리 공주님."

 머릿속에 아빠가 머리를 묶어주시던 날이 떠올랐다. 가장 좋아하는 핀을 골라서 아빠에게 골라준다. 아빠는 내가 양갈래 머리를 하고 싶은 날이면 양갈래를 해주시고, 땋은 머리를 하고 싶으면 또 예쁘게 땋아주신다. 아빠는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당겨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머리를 해주신다.


 "예린아, 혹시 유치원 버스에서 깜빡하고 선생님이 너를 두고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린이가 말을 못 하니까, 혹시 그럴 수도 있잖아."


 언젠가 아빠가 머리를 빗어주며 해주셨던 말이 파뜩 떠올라 눈을 떴다. 어지럽고 숨이 막혔지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기사 아저씨 자리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먼지 모르겠지만, 아빠와 시우를 생각하면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빠아앙- 빠아앙- 빵!"


 드디어 버스기사 아저씨 자리다. 경적을 손으로 치고 무릎으로 앉았다가, 엉덩이로 깔고 앉는다. 속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머, 저 버스에 아이가 있어요!"

 깜짝 놀란 아주머니가 달려아 소리치셨다. 곧이어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들쳐 안았다. 안도감에 한숨이 나온다.


 "열이 엄청나네, 빨리 구급차 불러요."

 아주머니가 호들갑스럽게 말하셨다. 

 나를 들고 내리는 아줌마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저기, 저기. 손가락으로 버스를 가리킨다.


 "응?"

 전혀 모르는 아줌마라서, 이 아줌마는 내가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도 모를 거다. 내 손가락 신호도 선생님은 아실 텐데. 나는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친구가 있어요.."

 나는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어머, 어머. 애가 하나 더 있나 봐요. 빨리 가봐요!"

 시우도 나온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시우가 걱정스럽다. 까치반 선생님이 헐레벌떡 달려오셔서 시우를 들쳐안으셨다. 선생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이제는 정말로 피곤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빠가 보고 싶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아빠와 할머니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계셨다.


 "우리 딸, 많이 무서웠지."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요."

 시우가 가장 궁금하다.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하셨다.


 "우리 예린이 덕분에 무사해."


 "대견한 우리 공주, 정말 잘했어. 경적을 안 울렸으면 어쩔 뻔했니.."


 아빠가 내 볼에 뽀뽀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 없이. 너무 간지러웠다.


 "아빠는 너 없이는 못 살아."


 같이 있는데도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내 마음이랑 아빠의 마음은 늘 같다.


 "이 어린것을, 그 뜨거운 차에다 두고 내려? 내 가만 안 둘 거다.."

 할머니가 눈물을 보이셨다. 목소리가 화가 잔뜩 나셨다.


 "하이고, 이 어린것이 그래도 똑똑해서 얼매나 다행이냐. 어떻게 그렇게 똑똑허게 굴었을꼬?"


 병실 문을 열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의식을 찾았나요?"


  "네." 아빠가 말하셨다.


 "아이를 참 잘 교육하셨어요. 이렇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는 아이가 몇 없습니다."


 "예린이가 말을 못 해 사고 날까 봐 아범이 잔소리를 달고 삽니다. 매일허는 잔소리를 허투로 안 듣고 잘 기억하고 있었네요."


  의사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기뻐서 대답을 잘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아빠는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예의 바르게 목인사를 했네, 하고 말해주셨다. 하늘색 이불보만 보고 인사한 것 같은데,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다.




 우리는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시우도 같은 병원에 있었나 보다. 멀리서 팔짝팔짝 뛰어오는 시우가 보였다.


 "예린아, 보고 싶었어!"


 시우를 빨리 안아주고 싶어서 나도 폴짝폴짝 달려간다. 조개 목걸이가 탁하고 열렸다.


 "나도, 보고 싶었어."


 시우의 눈이 똥그레 졌다.


 "예린이가 말을 했어요!"


 목에 따뜻한 핫초코가 들어간 것처럼 말랑말랑하다.


 "시우야, 네가 좋아."


  시우 얼굴이 빨개진다. 바닥을 보고 손을 괜히 흔들면서 시우가 아주 작게 말한다.


 "어, 나돈데."


 아빠가 무릎 비행기를 태워줬다가 후욱 내려갈 때 심장이 1초 늦게 가슴에 도착하는 것처럼, 기분 좋게 마음이 떨린다. 앞으로 시우랑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게 될까?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에 놀러 가자."


 라라 유치원에 들어가고 처음으로, 친구를 초대했다.


  "어?"

 간호사 선생님이랑 일을 마치고 오신 우리 아빠랑, 시우네 엄마가 토끼 눈을 하고 우리를 쳐다보신다.


  "어어, 우리 공주님, 방금 시우한테 말한 거야?"


 시우 엄마를 보자 딸꾹. 하고 다시 입이 잠겨버렸지만, 나는 이제 이 마법이 풀려버렸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왕자님을 만나니 우리 공주가 말을 하네요?"

 아빠가 시우 엄마를 보고 허허 웃으셨다.


 "엄마, 저 오늘 예린이네 집에 가서 놀면 안 돼요?"

 시우가 엄마에게 매달린다.


 "그래, 우리 오늘 예린이네 집 가자! 예린아, 그래도 돼?"

 시우 엄마가 물어보셔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랑 손잡고 계단을 우다다 내려갔다. '조심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늘 곁눈질로 보던 시우 엄마를 똑바로 보고 웃었다. 내 다리가 이렇게 빨랐나? 우르슐라는 이제 다시는 내 목소리를 가둘 수 없을 거다. 바닷속에 사는 문어같이 생긴 마녀를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난다. 


 우르슐라. 내 목소리를 돌려줘야 할걸? 나는 이렇게 빠르고, 또 용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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