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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만수 Oct 20. 2019

차별인가, 차별인가?

차별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힘이 담겨있다. 첫째는, 다르기에 두드러진다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남들과는 다른 차별점을 두어 나를 부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별의 두 번째 의미는 다르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한다. 따지고 보면, 첫째 때문에 두 번째가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라면 그 차별점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많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잠깐 초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면, 교사가 급식비 안 낸 친구를 아침 조회시간에 친구들이 보는 눈 앞에서 부르는 상식 밖의 행동으로 한동안 거지로 놀림을 받는 경우를 보았다. 이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뉴스 기사를 보아 아이들끼리도 집은 몇 평에 사는지, 부모님이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아파트의 브랜드에 사는지에 따라 차별한다고 한다. 이는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들이고 어른들도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물림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문제였지만 현시대에 와서야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성별과 장애인 차별 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에 이르고 있으며 그런 것을 총망라하여 각종 민감한 사항들로부터 차별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의 집합이 바로 이력서다.


여전히 국내의 기업에서 원하는 이력서는 틀에 박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몇몇 사안을 기입해야 하는 경우에 따라 자존심에 스크래치 가는 것은 물론, 이력서의 의도가 보이는 것도 적지 않다. 나 스스로가 통제 불가능한 사안에 대해 지극히 차별의 요소가 몇 가지 보이는 듯한 요소를 발견했다. 최근 들어서는 자유 형식의 이력서를 사용하여 지원자에게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기업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이력서를 요구하면서도 사진을 첨부하지 않으면 서류심사부터 탈락시키는 기업도 있다. 자유 이력서라는 말이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다.


군필자 우대합니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요소의 대표 격으로는 성차별이 있다. 채용공고를 보다 보면 군필자 우대라는 말을 본 기억이 있다. 이는 대놓고 성차별을 할 수는 없으니까 여성이 아닌 남성이 눈치껏 지원하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암구호 같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성별을 정할 수 없다. 각종 산업현장에서는 여성, 남성이라는 이유나 혹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특히나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경우인데 수세기 전부터 내려오던 남성주의 의사회가 현재 여성의 위치를 만들었다.


과거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현재 진행 중인 각종 여성운동이 이를 반증한다. 여전히 다른 국가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거나 하는 등의 상식 밖의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 투표권을 주지 않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 다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여성들의 시험 점수를 조작하여 일부러 남성 지원자들을 붙게 하는 등으로 채용 관련 기사가 난 것을 보면 아직도 그것과 관련된 의식이 얼마나 하등 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논의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란 환경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성별이 다른 것에 따라 이성이 지지 않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많다. 남자나 여자나 한쪽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면 그건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건 결론이 절대 날 수 없는 문제다. 여자도 여자니까, 남자도 남자니까 받는 혜택도 있고 불이익이 있는 것이다. 어떤 성별이 더 피해를 많이 본다고 겨루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바보같은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서로의 피해를 공감하고 미래를 위해 나아갈 생각을 해야 우리가 바라는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선천적으로 다른 존재다. 이 둘을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등은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회현상은 바로 역차별이다. 특정성별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성별은 정말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메리트가 생긴다. 성 할당제가 바로 그것이다. 차별은 또 하나의 차별을 만든다. 위에서는 여성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아님을 밝혀둔다. 안타깝게도 여성의 경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에게 일을 맡기는 업무 기피와 파벌 형성, 그리고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일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부정적 이미지로 자리 잡은 영향도 크다. 여성 CEO가 여성을 안 뽑으려고 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으니까. 자신이 오직 남성이어서, 혹은 여성이어서 받는 혜택, 그 또한 차별이다. 유리천장이 있다면, 유리 바닥도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생김새가 내 취향이 아닌데?


외적 차별의 시작점은 얼굴이다. 과거에 표준이력서라고 불리는 차별 이력서에는 사진을 부착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전신사진은 아니고 얼굴이 부각된 사진을 붙인다. 업무적 능력이 아니라 그 사진 하나를 잘 나오게 하기 위해 각종 공을 들이는 취업준비생들도 많다. 주객전도된 상황인 것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성별에 대한 차별이 끝나면 누가 더 예쁜가, 잘생겼는가를 본다. 그 기준에 대해 스스로만 가지고 있든지 한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개인 취향선에서 그치는 것이다. 


공적인 부분에 외모를 차별의 요소로써 이용하게 되면 더 이상 취향이라는 개인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 취업을 위해 성형까지 고려한다는 친구들도 있는 것을 보면, 쉽게 넘길만한 문제라고 여기기는 감히 어렵다. 사람은 인상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이는 사실이고 기업에서도 전략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 예를 들어 1차, 2차 산업군과 사무실 직원은 외모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진을 요구한다.


사진 이외에도 외적 차별점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키와 몸무게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항목은 사람의 자존심을 건들기에 아주 적절한 요소가 된다.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는 10대 때부터 키와 몸무게에 대한 것은 사람에 따라 매우 예민하다. 도대체 이 사항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디 강인한 체격이 요구되는 스포츠를 하는 걸까? 옷이라도 한 벌 맞춰주려고?


아버지는 무슨 일 하시니?


학교 다닐 때 한번 잘못을 저질러서 학생부에 끌려간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교사가 한 말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뭐하셔? 의도가 가득 담긴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을 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그 교사가 아직도 생생하다. 개인적으로 그 교사 잘 먹고 잘 사는지 참 궁금하다.


본래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내려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이력서에는 배경과 같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을 넣는 곳도 있다. 바로 가족관계와 직위, 연봉, 직업 등을 기입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주거형태까지. 자신이 있다면 당연히 해당 사항에 대해 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으니까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다닌다. 반면 자신 없는 친구는 마음에 삭힐 뿐이다. 그건 내 탓이 아닌데. 학교에 다닐 때도 이런 비슷한 것을 적어 제출할 때가 해마다 있었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별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어렸으니까. 가족 구성과 그 가족의 직업, 직위, 연봉, 부의 축적을 나 스스로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내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기업에서 능력밖에 있는 사항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족이 고위급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면 다르고 두 부모가 없는 천애 고독이면 다르게 대할 심산인 건가? 촌지나 받아먹던 과거 세대에 대한 잘못을 부디 되풀이하지 말자. 이러한 가족관계 사항을 넣어야 하는 이력서를 보면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난 내 배경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설마 이렇게 의도가 보이는 사항들에 대해 기분 좋게 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의식주 중에서 '주'에 대한 부분은 현시대에 들어 부를 짐작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여기에 자가, 전세, 월세에 대한 주거형태에 대한 부분도 빠질 수 없다. 아이들은 고급 브랜드 아파트에 살지 않는 친구를 차별한다. 빌라에 사는 친구를 '빌거' 라 부르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휴거'라고 부른다. 각 의미는 '빌라 거지'와 '휴먼시아 거지'라는 의미다. 이건 다 어디에서 나온 것들인가? 아이들에게 그딴 것이나 가르치고 다니는 일부 부모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자신들이 정말 어른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아이들은 그저 태어나서 학교를 다닐 뿐인데 어디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놀림받아야 한다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일부 소개팅 얘기도 듣다 보면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어디 사냐고 묻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의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말이다. 자신은 가진 것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생기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발생하는 혜택은 받고 싶은 모양이지?


주거에 대한 부분은 부를 짐작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다른 것 못지않게 정말 예민한 부분이다. 당연히 이 부분은 회사에서 직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대한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다. 자가에 살면 다 일 잘하는 억대 연봉 자이고 촌락에 살면 다 힘든 일 하는 사람인가 보다? 말이나 되는 소릴. 지금은 아니지만 부에 대한 차별은 과거에 국가에서 시범을 보인적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생활보호대상자와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의 건강보험증의 색깔이 달랐다고 한다. 병원에서 찾아가라고 하면 다 드러날 정도로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고.


몇 살이세요?

 

새해가 되면 모두 한 살이 더 먹는 이 세상 방식이 아닌 것 같은 셈법과 한국어가 지닌 존댓말, 그리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윗사람 행세를 하려 드는 서열문화는 나이의 대한 차별을 만들었다. 자신보다 아랫사람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일까, 일을 못하나? 업무효율이 떨어지나? 아, 서열문화에 충돌이 생기기 때문이구나! 기업에서는 나이 서열 이외에 연공서열이 있으니까. 전 대통령의 방식을 사용해보자. 하나가 충돌이 생겨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을 없애면 그만이다.


적어도 회사에서는 나이 서열에 대한 서열문화를 없애는 것이 합리적이다. 나이는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존중의 의미다. 나이가 적다면 많은 사람을 존중하고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을 존중하는, 존댓말이란 것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영어에는 격식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이 있지만, 한국어와 존댓말처럼 명확히 구분 지어 말하지는 않는다. 


캐나다를 워킹홀리데이로 갔을 때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나이의 여부를 알아야 할 때는 전혀 없었다. 그런 반면 우리나라는 한국어의 반말 존댓말 특성이 서열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묻고 서열을 정리하려는 성향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서로가 불편해지는 건데 그것을 왜 스스로 자초하는지 모르겠다. 난 위아래가 없는 사람이다. 어르신에게도, 초등학생한테도 존댓말을 쓴다. 일에는 나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기업에 필요한 인력이고 그것을 해낼 능력이 있다면 기꺼이 채용하면 된다.


대학 어디 다니세요?


학력은 '스스로 통제 가능한 요소' 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요소'이기도 하다. 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학력이 아닌 오직 실무적 능력만 보는 블라인드 테스트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학벌이라는 것이 가지는 위치는 무시할 것이 되지 못한다. 분명, 대학 입학에 있어 사교육을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 그리고 부모가 하나하나 챙겨주는 사람과 나 스스로 챙겨야 하는 사람, 인맥으로 스펙을 채우는 사람과 인맥은커녕 부모님도 건사하기 힘든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학력은 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단지 그것이 또 다 맞는 것도 아닌 부분이 있어서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요소'에는 포함시키지 않으려 한다. 학력은 마음먹고 공부하고 다시금 도전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들 수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통제 가능한 사항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대학의 입학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단지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늦게 대학에 입학하거나 편입을 하게 되면 그다지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스스로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다면 나이를 먹고, 일을 하면서도 편입을 하든 대학원에 입학하든 할 수 있다. 부모가 학력을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단지 부모가 도와주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한 노력마저 펌훼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입시 비리 같은 것은 예외로 두기로 하자. 그런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짓을 하면 당사자가 설령 노력을 어느 정도 했더라도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학력은 '스스로 통제 가능한 요소'로써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일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학력을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하나의 요소로서 사용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반발심이 심한 것은 아니다. 나도 학력이 좋지 않다. 하위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에게 이미 경쟁에서 수 없이 많은 패배를 겪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무조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요소'에 의한 차별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학력을 너무 중요시하기 때문에 공교육이 아니라 사교육이 집중되어 있고, 빈부의 차이에 따라 교육의 질이 현저히 차이 난다. 그래서 학력을 차별의 한 요소로서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 국가에서는 그렇게 권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이란 공부할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일단 졸업장은 따야 하는, 설령 공부에 관심이 없더라도 가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현재 70%가 넘는다. 예전에는 대학을 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대학을 진학하는 것 자체에 대한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대학을 나왔냐가 관건이 되었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일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하위권에 있는 대학 출신이라도 잘하는 사람은 있다. 분명 대학의 간판이 그 사람의 직무 능력을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뽑고 보니 상위권 대학 출신이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상위권 대학에 속했던 사람들이 하는 공부의 수준, 인적 네트워크 등이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학의 간판만을 채용의 요소로 삼으면 예외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학력이 사람을 평가하는 요소로써의 비중이 커질 때, 점차 사교육 시장은 커지고 빈부격차에 의한 교육의 질 차이는 심해질 것이며 저소득층이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약 도약 시도를 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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