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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수 Nov 17. 2019

경칩(驚蟄)

경칩은 24절기 증 세 번째 절기로, 태양이 황경 345도를 통과할 때이다.

동지로부터 74일째 되는 날이다.  

경칩은 땅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며 땅 밖에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들어있는 절기이다.  


중국은 2016년, 24절기를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에 신청했다. 

이에 2016년 11월 30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렸던 <제11차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 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24절기가 심의를 통과해 '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국제 기상학계는 24절기란 중국의 역법(歷法) 체계에 대해 '중국의 5대 발명품'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또 유네스코는 24절기가 "계절과 천문학, 자연 현상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중국 전역에 적용됐다."

면서 "지금까지도 농업인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경칩이 지나고 나서 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하고 (桃始華),  좀 더 있으면 

꾀꼬리가 울기 시작하며(鶬鶊嗚), 점 더 시간이 지나면 매가 비들기로 변한다(鷹化爲鳩)고 기록돼 

있다.

고대인들은 경칩 무렵에 첫 번째 천둥이 치고, 이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땅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한서(漢書)>에는 열 '계(啓)'字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字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기록돼 

있다. 

한데 후에 한무제의 이름인 계(啓) 字를 피휘(避諱)하여 대신 놀랠 '경(驚)' 字를  쓰면서부터 '경칩(驚蟄)'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제자행(弟子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其足不履影, 啓蟄不殺, 方長不折. 

                                          (공자는 발로 그림자를 밟지 않았고, 땅속에서 나온 벌레를

                                           죽이지 않았으며,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았다.)


이 집해(集解)에 '啓蟄蟲初出也(계칩엔 겨울잠을 자던 벌레가 처음 나온다)'라는 문장에 바로 '계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또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을 보면, "2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또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경칩이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므로, 이를 잘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24절기는 주(周)나라 때 황하강 유역을 기준으로 1년 간의 태양 주기운동을 관찰해 만든 것이다.

즉 황하강 유역 화북지방의 계절과 천문학, 자연 현상의 관찰을 통해 만들어져 중국 전역에 적용이 됐고, 

그 주변국까지 전파됐다.

때문에 위도 등 위치가 다른 우리나라 기후와 24절기의 날씨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예전(禮典)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本)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했다.

선농제는 조선시대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서울 동대문 밖 

동교(東郊) 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를 지내던 행사를 말한다. 

선농제, 선잠제(先蠶祭)와 함께 중간 규모의 제사인 중사(中祀)에 해당한다.

왕실에서 지내는 모든 제사는 대사(大祀)이건, 중사(中祀)이건, 소사(小祀)이건 간에 주최자는 

당연히 왕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모두 직접 챙길 수가 없어, 사대문  안에서 지내는 큰 

제사인 대사(大祀)만 왕이 직접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즉 종묘와 영녕전(永寧殿), 원구단(圜丘壇), 사직단(社稷壇) 제사는 임금이 직접

받들고, 나머지는 각 제사와 연관있는 부서의 대신들을 파견해 왕을 대신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조선시대엔 경칩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소사(小祀)로 규정된 둑제(纛祭)를 지냈다.  

 군이 주둔하는 여러 곳에 둑소 즉 둑신사(纛神祠)를 마련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큰 깃발 대장기(大將旗)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둑(纛)이란 왕의 대가(大駕) 앞이나 군대 대장 앞에 세우던 대형 군기(軍旗)를 말한다. 


둑제는 소사(小祀)이기  때문에 중앙에서는 경칩인 음력 2월과 상강일(霜降日)인 음력  9월, 이렇게

일 년에 두 번씩 왕을 대신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주관해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무관(武官)인 병조판서가 왕을 대신해 지냈던 유일한 국가 제사이다.  

둑제에서는 잔을 올릴 때 납씨가(納氏歌)를 불렀고,간척무(干斥舞)와 궁시무(弓矢舞), 창검무(槍劍舞)

등의 춤을 추었다.

간척무는 제사 초헌 때 왼손엔 방패 오른손에는 도끼를 들고 추는 춤을 말하고, 궁시무는 아헌례 때 

활과 화살을 들고 추던 춤이다.   

또 창검무는 둑제의 종헌 때 창과 칼을 들고 추던 춤을 말한다.


둑제는 음악과 무용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에 가까웠다.

서울의 '뚝섬'은 이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纛神祠), 즉 사당이 있던 곳이다.

'뚝섬'이란 지명은 바로 이 둑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둑제를 세 차례 지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중앙에서 병조판서가 둑제를 지내는 것 외에, 각 지방에서도 군의 지휘관들이 일 년에 두 번 

제사를 지냈다. 

기록을 통해 음력 2월 경칩과 음력 9월 상강일에 지방의 둑소인 둑신사(纛神祠)에서 대장기인 둑(軍旗)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정(朝廷)에서는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나 갓 자라는 풀이 상하지 않도록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

(禁令)을 내렸다.

<성종실록>에는 "우수(雨水)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驚蟄)에는 새싹이 돋는 것을 기념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하여 조정에서는 우수와 경칩부터 본격적인 농사준비에 들어가도록 독려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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