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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속 돌멩이 같은 슬픔

넷플릭스 시리즈 < 다 이루어질지니(2025)>

by 양보

넷플릭스 시리즈 <다 이루어질지니(2025)>는 소원을 이뤄주는 지니(김우빈 분)가 사이코패스 기가영(수지 분)을 주인으로 만나면서 펼쳐지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다. 능청맞은 지니와 감정이 결여된 가영이 부딪히며 이뤄가는 케미가 시종일관 웃음을 만든다.


그런데 왜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이 필요했을까? 로맨스 장르에 감정이 결여된 여자 주인공 설정은 다소 낯설었다. 하지만 회차가 지날수록, 시리즈가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방식이 기존 드라마들과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차별점이 시리즈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세 가지 소원을 이뤄주는 지니는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며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 지켜봐 왔다. 그의 소원은 인간 안에 깊숙이 자리한 질투, 시기, 탐심, 미움을 드러나게 했고, 인간은 고민도 없이 어두운 감정을 쫓아 선택했다. 극 중 지니의 또 다른 이름은 ‘이블리스‘. 사람을 유혹해 타락으로 이끄는 사탄이다. 규칙과 루틴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가영에게 지니의 세 가지 소원은 유혹적이지 않았다. 그는 가영을 타락시킬 수 없었다.


결여.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게 빠져서 없는 모자란 상태를 세상은 경계한다.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편함. 사이코패스 가영은 그런 존재였다. 감정이 없어 공감하지 못하는 그녀를 세상은 불온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여겼다.


가영의 할머니 미주(안은진 분)는 가영을 불편한 현실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가영이 상처 입히고, 부서뜨리고, 망가뜨릴 때면 똑같은 아픔을 가영이 겪게 했다. 가영이 걸어갈 길을 평평하게 만들지 않았고, 피할 길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대신 꾸불꾸불하고 울퉁불퉁한, 크고 작은 돌멩이로 가득한 불편한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사이코패스를 교육할 수 있다, 없다의 논쟁은 이 시리즈에서 다룰 건 아닌 듯싶다. 다만, 극 중 가영은 할머니와 자신을 돌보는 이웃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감정적인 공감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로 고통과 슬픔, 아픔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게 사랑이 아닐 리 없다.


세상이 불편히 여기는 ‘결여’는 가영으로 하여금 오히려 본질을 보게 했다. 진실을 흐트러뜨리는 유혹 속에도 가영은 의로운 소원을 빌었고, 인간 앞에 무릎을 꿇게 함으로 지니의 오만을 끊어낸다. 모두 세상이 불편하게 여기는 ‘결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시리즈는 이런 아이러니를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로 풀어낸다. 시에서 ‘슬픔’은 연민과 공감을 지녔고, ‘기쁨’은 이기적인 사랑이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기쁨은 좋은 것, 슬픔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와 정반대를 이룬다.


사이코패스와 사탄은 악하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사이코패스를 살인자로 만들지 않았다. 가장 악하고 못되고 나빠야 할 이들이 오히려 ‘슬픔’을 닮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보다 더 사랑을 알았고, 옳지 않은 일을 분별했으며,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스스로를 경계하며 결국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의로운 소원을 빈다.


반면, 일반적으로 때 묻지 않은 영혼이라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불멸의 존재는 탐욕의 끝을 보인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죽음의 천사 수현(노상현 분)은 모두가 의로운 싸움을 싸우는 마지막 순간에도, 혼자서만 300년 전 전투의 승리를 위해 행동한다. 이들은 시 속에서 상징하는 ‘기쁨’을 닮았다.


극 중 사이코패스 기가영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타락이 그렇게 당연한 거면 사람들은 나를 사이코패스나 위험요소로 분류하지 않았겠지. 나는 빨간불에 건너본 적도, 쓰레기 하나 버려본 적도 없어.”(3화)

“난 사이코패스야. 그래서 난 나쁜 선택을 하는 게 쉬웠어. 그런데 반듯하게 크려고 어려운 선택만 했어. 그런데 너는?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건데?”(7화)


가영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결여를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려운 선택을 했다. 그런 가영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정호승 시인의 시에서 말하는 이기적이기만 한 ‘기쁨’의 옷을 입고, 고민도 없이 나쁜 건 그저 나쁜 거라며 공감하지 않고, 연민의 마음을 저버린 채 비루한 ‘슬픔’을 지니며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사이코패스만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상대의 마음을, 그 아픔을 다 알지 못한다.


반면 가영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안다. 나는 모른다는 걸 모른 채, 안다고 믿기까지 했다. 어쩌면 어떤 순간에는 가영이 나보다 ’슬픔‘을 더 잘 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신발 안의 돌멩이 같은 불편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있는 돌멩이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시기할 이유도, 가지지 못한 것을 애타게 원하며 괴로워할 이유도 없다. 그건 진정한 ’슬픔‘을 만들지 못한다.


내 신발 안에 있는 돌멩이는 내게 필요한 포용과 연민, 그리고 그 가치를 발견하게 할 질문이 된다. 이를 알고 가영에게 불편함을 그대로 두고, 어려운 선택을 하게 가르친 할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슬픔’이다.


시리즈를 보며 중간중간 생각했다. 내게 세 가지 소원을 이뤄줄 지니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소원을 빌까? 쉽게 가진 건 쉽게 잃었다. 잃은 순간 아쉬워할 수도 없었다. 거저 주어진 것이었기에. 무엇보다, 행운권 추첨 한 번 당첨되지 않는 내 팔자에 성실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성실은 쉬운 선택의 유혹을 조금 견디게 해 준다. 그렇다면 사실 모든 건 이미 다 이뤄진 게 아닐까?


때때로 쉬운 선택으로 넓은 길로 가고 싶을 때, 이 유쾌한 드라마가 떠올라 준다면 좋겠다.


“그렇지만 할 거야. 난 좋은 선택을 할 거야.

나쁘게 태어났어도 그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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