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는 일본인이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간사이 지역에 살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친은 사가현의 히코네시에 살고 있다. 히코네시로 가기 위해서는 간사이 공항에 도착해, 간사이 공항의 지하철에 탑승해 오사카를 지나 교토역에서 환승해서 한 시간 정도 들어가면 히코네시로 도착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히코네시를 가본 건 두 번 정도인데, 한 번은 여자친구 부모님의 차를 타고 이동했었고, 다른 한 번은 혼자서 전철로 이동했었다.
여자친구와 한국에서 신나게 놀다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간사이 공항으로 이동했을 때, 처음으로 여친의 부모님을 만나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일반적으로 딸을 가진 아버님들이 그렇듯이―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나에게 무뚝뚝했지만, 어머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OOOです”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나와 악수했다.
간사이 공항에서 차를 타고 2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여자친구의 집 앞에 도착했다. 2시간 30분 동안 펼쳐진 풍경은 여자친구와 부모님에게는 늘 똑같은 풍경이었겠지만, 처음 보는 간사이 공항 최상층 주차장, 간사이 공항 주변 풍경, 1시간 30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일본의 휴게소, 여자친구의 집 근처, 이 모든 풍경은 한국인인 나에게 신기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여자친구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일본식 가정 맨션을 구경할 수 있었고, 여자친구의 집 구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플한 구조의 일본식 가정 맨션이었다.―일반적으로, 일본의 집들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분리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 구조이다.― 난생처음 보는 코타츠(일본식 전기장판)와 NHK가 아닌 다른 텔레비전 채널들은 내가 일본에 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었다. 아무튼 첫째 날은 도착한 시간이 시간은 대략 오후 8~9시쯤 됐기에, 시간이 너무 늦어서 샤워한 다음 바로 침대에서 잤다.
둘째 날이 되었을 때,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아침 일찍 출근했고, 나와 여자친구는 히코네의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히코네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여자친구는 너무 시골이라서 별로라고 말했지만, 오사카와 교토와 달리 사람이 쓸데없이 많지 않고, 은근히 군데군데 볼거리가 많아서 나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마을 이곳저곳을 대략 둘러본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이미 퇴근한 뒤 핸드폰으로 테트리스와 비슷한 게임을 하면서 반겨주셨다. 그리고 “배고프지?”라고 나에게 말한 뒤에 식사를 준비해 줬다.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식사 중에 어머님께서는 내일 시가현의 가볼 만한 곳을 같이 가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여자친구 할머니 댁에도 들릴 참이니 같이 시골 여행을 가보자고 말했다.
내가 사전 조사한 시가현은 차가 없으면 여행을 하기 힘든 곳이다. 그리고 나 같은 외국인이 시가현의 풍경을 구경할 기회가 사실상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라고 생각해서, 배시시 웃으며 여자친구 어머니께 “가게 된다면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셋째 날, 우리는 아침 9시 반쯤에 집을 나와 여자친구 어머니의 자차를 타고 나와서 할머니 댁으로 이동했다. 이동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우리는 배가 너무 고파서 중간에 회전초밥집을 들러서 양껏 먹은 다음 다시 할머니 댁으로 이동했다.
여자친구 할머니 댁에 도착하기 10분 전 길목은 굉장히 좁은 골목을 지나, 다른 연립 주택 앞 1차선 비포장도로를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 좁은 골목을 지나면 이 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조금만 더 직진하면, 여자친구의 할머니 댁이 나온다. 나도 시골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이렇게나 특이한 경로는 내 뇌리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겨우 도착한 여자친구 할머니 댁은 본채와 별채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나는 별채로 이동했었다. 이동한 별채의 입구는 에도시대를 연상시키는 집 풍경이 있었다. 활기 넘치는 말(馬) 그림과 꽃꽂이를 한 꽃의 모습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때 나는 일본의 미가 무엇인지, 일본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그 꽃들이 내게는 너무 아련해 보여서 마냥 감탄해서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여자친구의 할머니가 주방 일을 하고 있었다. 주방 일을 하고 있었던 그녀는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래며, “왜 전화도 없이 갑자기 왔어!”라고 말하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한 뒤에 악수를 청했으며, 그녀 또한 헐레벌떡 손을 닦고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처음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란 훈장은 그녀의 손을 단단하면서 푹신한 촉감을 만들어 냈으며, 그 촉감과 손의 흔적에는 그녀의 인생이란 역사를 짧게나마 느끼게 해 줬다.
할머니는 나에게 관심을 짧게 가진 뒤, 곧바로 자신의 손녀인 여자친구에게 웃으며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손녀에게 “곧 말레이시아로 떠나는데, 생일을 못 챙겨 줄 것 같아서 미리 생일 선물을 챙겨 봤어.”라는 말을 하며, 한자가 적힌 종이봉투를 건넸고, 그 봉투 속에는 용돈이 들어 있었다. 여자친구가 고개만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나와 어머님은 “고맙다고 말을 해야지!”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허그라도 해 드려”라고 말했지만, 여자친구는 우리의 말을 무시하며 인사를 한 번 더 했다.―나는 왜 저럴까?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때 포옹하지 못한 여자친구가 더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집 안과 집 밖을 구경하고, 난생처음으로 ‘日本犬’(일본견) 즉 일본산 견종을 처음으로 보았다. 평생 시골에 살았던 녀석은 처음 보는 외지인인 나의 모습에 경계했지만, 그 경계심은 금방 풀려서 나와 같이 점프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그날 날씨도 추웠고, 그 개도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지만, 나와 여자친구가 자신을 보러 와준 게 신이 났는지 펄쩍펄쩍 뛰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집 구경을 다 한 뒤에, 다시 히코네로 돌아가려고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나갔는데, 할머니께서는 좌측에 장식물을 꺼내더니 나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어보았다. 나무 위 사람 모양이 무수히 많은 장식물이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 몰라서,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것이 쿠난(苦難)이라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 모양이 정확히 97개가 있는데, 이것은 ‘큐쥬 나나’(97의 일본어 발음) 즉 쿠난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 이만큼 많이 있다고 설명했다.―그렇다. 인생은 예측하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다.
집 구경이 끝난 뒤에 나는 여자친구 어머니의 차에 올라타 뒤에서 손을 흔드는 할머님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머님은 “다음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한 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 맞다! 같이 사진 찍었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어머님은 “다음에 일본 올 때 사진 찍으면 되지.”라고 말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할머님이 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나에게 왠지 모를 아쉬운 여운을 남겼다. 그때 나는 갑자기 차를 세우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서 사진 찍으러 갑시다.”라고 말하고픈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다음에 찍으면 되지라는 안일함에 사로잡혀서 다음을 기약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디저트 가게였다. 디저트는 많았지만, 찜찜한 기분에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자친구와 어머님께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다음 장소는 메타세콰이어길이었다. 메타세콰이어가 쭉 늘어져 있었지만, 겨울이라서 앙상해 보였고 추위가 너무 매서워 잠시 보다가 곧바로 차로 돌아갔다. 역시 겨울은 추웠고, 겨울 날씨는 잠시나마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지만, 나의 찜찜함은 그때까지도 마음속 깊숙한 곳 한편에 박혀 있었다.―그녀, 사진, 뒷모습.
그렇게 히코네시에서 시간을 잘 보내고 난 뒤, 한국으로 귀국하고 또 한 번 히코네로 갔지만, 어머님의 일과와 운전면허가 없는 나와 여자친구는 그녀의 집에 갈만한 여력이 되지 않아 또 한 번 다음을 기약했다.
여자친구는 대학교가 개강해 말레이시아로 돌아갔고, 나는 서울의 찻집에서 아르바이트와 다회를 하면서 좁은 고시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다회가 없을 때면, 나는 본가로 돌아와 쉬곤 했는데, 이유는 생활비도 생활비지만, 본가의 침대는 나에게 너무 아늑하고 좋았다. 본가의 침대에서 너무나도 길게 자고 일어났을 때, 시간은 1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잠을 잔 나는 오랜만에 푹 잔 나머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며 반찬을 꺼냈다.
2025/05/15. 15:30경, 갑자기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친은 보통 나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덜컥 전화를 받았다. 여친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기 때문에 초반에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왜 전화했어?”라고 물어보았고, 그녀는 전화하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평소와 같이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여친의 말투가 우울해지는 점을 눈치챘다. 나는 그녀에게 “왜 이렇게 텐션이 낮아?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오늘 할머니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데.”라고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나는 여자친구를 위로하며, 나와 전화를 끊고 나서 슬픔을 참지 말고, 펑펑 울라고 말했다.―그녀는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그녀의 계좌로 소액의 부조금을 부쳐주었다. 그녀는 처음에 받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받지 않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무조건 받으라고 말했다.―이날은 여자친구의 생일 4일 뒤였다.
학부 시절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책을 주로 읽었는데 그의 저서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과 딸을 비교하면서 ‘여동생의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은 시간이 지나도 존재하지만, 딸 아이의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은 그때만 존재하고, 딸 아이의 3학년 때 바다와 4학년 때 바다는 다르다. 어른들은 이번에 잘못했으면 다음에, 상반기에 여행을 못 갔다면 하반기에, 그 사람이랑 헤어지면 저 사람과 만나면 된다. 라는 식의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 잘못한 것과 다음에 잘하는 것과는 다르고, 상반기의 여행과 하반기의 여행은 다르고, 그 사람과 저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 <느슨하게 철학하기> 中
아즈마의 말처럼 ‘이번에 ‘못’ 한 것’과 ‘다음에 ‘한’ 것’은 다른 의미이며, 결국 그때 ‘못’ 한 것은 그때 ‘못’할 뿐, 다음에 ‘한’ 것과는 다르다. 즉 ‘그 순간 행동의 부재’는 다른 시간으로 채울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때’를 만회할 수 있다고 오만함과 안일함에 빠져있을 뿐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2025.05.16. 14:51경, 여자친구는 나의 이름을 한자 이름으로 물어보았고, 나는 내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 네이버 사전을 켰다. 내 이름 석 자를 알려준 다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이름을 왜 물어보는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굳이 되묻지도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친인척의 부조금을 내보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잠시 기도를 한 다음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잠시나마 멍하니 서 있었다.
역시 인생에 ‘다음에’, ‘다음에 다시’라는 건 없었다. 나와 내 여자친구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그녀와 나는 어느 한 시골에서 10분 정도밖에 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에, 나의 안일함을 벗어나게 해 준 것에 정말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