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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Mar 01. 2022

글(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왜 우리는 글을 읽어야 할까?



‘미국이 월평균 6.6권, 한국은 0.8권이라는 통계가 우리의 현실이다.’
‘책 안 읽는 한국인…성인 절반 이상 1년에 한 권도 안 본다.’
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말은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글(책)을 안 읽을까?
그 이유는 플랫폼(특정 장치나 시스템 등에서 이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는 틀 또는 골격을 지칭하는 용어 - 네이버 지식백과/플랫폼이란 무엇인가)의 전환이 글을 안읽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술래잡기를 하고, 놀이터에서 놀았다. 그리고 공책으로 게임을 만들어서 놀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직접’ 게임에 참가해 노는 행위이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 ‘스마트폰’, ‘리그 오브 레전드(LOL)’란 게임이 유행하게 되면서 놀이터에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직접’ 놀았던 우리는 가상세계의 ‘대타자(代打者)’(가상 세계 속 ‘나 자신’을 의미함.)를 통해 간접적으로 놀게 됐다. 이것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좋은 것도 아니다. 

앞서 설명한 스마트폰, PC게임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오프라인 플랫폼’을 잡아먹었다. 온라인으로 콘텐츠가 전위 된 시대에서 우리는 ‘칸트 - 순수이성비판’ 책을 직접 보지 않아도 유튜브에서 칸트 전공자가 ‘순수이성비판’을 알려주고, 심지어는 ‘10분’이면 학자의 이론을 알려주는 영상도 있으니 공부하기 편해졌다. 하지만 직접 공부하지 않는 문화가 팽배해져 ‘스노비즘’(고상한 척하는 속물근성 또는 출신이나 지식을 자랑하는 취미나 타입을 이르는 말. - 네이버 어학사전/우리말샘)과 ‘유사 전문가’들이 생겨났다.

‘무슨 무슨 전공자’가 ‘해당 학자’에 대한 이론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 말을 따라만 하면 쉽게 공부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미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대학에서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자신의 말을 할 수 없고, 권위에 호소하는 시대에서 자신의 말(word)을 만들 수 있고, 직접적으로 할 수 있고, 남들과 차별성을 둘 수 있는 것이 바로 ‘책 읽기’다.

안타깝게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서울대에 가지 못할 수 있고, 큰 성공을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독서가 필요한 이유는 ‘당신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 평론가 새뮤얼 존슨은 “책은 각자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거나, 그게 아니면 존재를 견딜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책은 그렇게 만들어 준다. 

무슨 이유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책이 왜 삶을 바꿔주는지 ‘필자’의 경험을 통해 알아보자.


1. 생각이 풍부해져 나만의 카드가 많이 생긴다.

책을 읽으면 생각이 풍부해진다. 너무 식상한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생각이 풍부해진다. 생각이 풍부해지기에 더 많은 글귀를 응용할 수 있고, 응용할 수 있기에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이상(1910~1937)’의 <시제1호>를 나름대로 해석한 적이 있었다. 시론(詩論)은 물론 국문학을 공부해본 적도 없었다. <시제1호>를 ‘근대성’과 ‘일본강점기 때 배경’을 가지고 해석했었다.

작성한 글의 내용 중 “시에서 ‘도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도로’는 근대화의 산물이다.”라고 표현했고, 이상의 시가 왜 근대적인지 말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고려해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나름대로 적었다. 그리고 이 글을 국어국문학과 교수님께도 보여드렸는데, 도로와 근대성적 접근이 좋았다고 평을 받았다. 이처럼 책만 읽었음에도 국문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문학을 해석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김상봉 교수의 ‘서로주체성’ 이론을 가지고 미술 작품을 평론한 글도 썼다. 물론 글의 퀄리티는 떨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사례를 통해 책을 읽게 되면 자신의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유럽을 다녀오지 않아도 유럽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고, 당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도 일본 문화에 관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이 책의 힘이다. 이러한 점을 책으로 배웠기에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게 된다면 당신의 카드는 점점 많아질 테고 결국에 본인이 원하는 패를 가질 수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자신의 지식의 한계는 자신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책은 본인의 지식과 세계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직접 지식과 세계를 넓히는 ‘주체’가 된다.

     

2. 자기만의 확고한 줏대가 생긴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의 고민에 대부분은 수십, 수백 년 전 학자들이 했기에 그것을 참고하고 본인의 지식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논리에 줏대를 만들면 된다.

물론 이러한 ‘줏대’가 ‘고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줏대’가 생기면 타인의 의견을 나만의 공식대로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 유튜브에서 학자의 이론을 수십 가지를 공부한다면, 결국 ‘학자’의 의견이 아닌 학자의 의견을 공부한 ‘사람’의 의견을 공부한 것이다. 물론 이런 영상을 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본인의 ‘줏대’가 없는 상태에서 영상을 본다면, 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표도르 도스토옙스키 作品) 책을 가지고 ‘A’라는 사람은 유튜브로, ‘B’라는 사람은 직접 책을 읽고, ‘러시아문학 전공자 C’와 함께 이야기했다. (여기서 A, B는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저서를 처음 각자의 콘텐츠로 접하게 됐다) 물론 ‘A’가 도스토옙스키 전공자들의 영상을 보고 왔을 수 있기에 ‘B’보다 작품 해석을 더 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C’가 “그 책 ‘n쪽’ 보면 이러이러한 말을 했는데 그 부분 흥미롭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면 ‘A’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공자들의 ‘영상’만 보았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지는 않았다. 그래서 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B’의 경우 서툴러도 “아 맞아요~”하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여기서 차이가 드러난다.

이처럼 ‘줏대’란 어디에서 오는가? ‘줏대’는 Fact에서 온다. Fact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본인의 중심을 만드는 작업이다. 앞서 말한 예시로 설명하자면, ‘A’는 ‘원문 or 번역문’(Fact)을 본 게 아닌 타인이 만들어 놓은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내면화했다. 즉 남들이 만들어 놓은 상(象)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반면에 ‘B’는 ‘A’보다 해석을 잘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책의 부분을 떠올려 이야기할 수 있고, 원문을 알기에 자기 생각과 비교한 ‘생각’을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나의 언어’가 만들어진다.

남의 의견이나 권위에 기대면 편할 수 있지만 ‘피상(皮相)’만 볼 수 있으며, ‘나 자신’의 주체적인 의견과 생각은 갖지 못한다. 하지만 원문을 읽는다면, 원문의 글과 내 생각과 싸우게 된다면 ‘줏대’가 생긴다. ‘줏대’가 생기면 ‘나의 언어’라는 주체가 만들어진다.     


마치며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이에 ‘본인 마음에 드는 책(표지, 제목, e북 등등 e북의 경우 플랫폼만 온라인 사용한 것이지 종이책의 본질과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함.) 보면 된다.’라고 답해주고 싶다.

어차피 독서는 순간의 기억이 된다. 한 권의 책을 수백 번 본다고 해도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쭉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살다가 어느 순간 머릿속에 ‘탁!’하고 떠오를 때가 있다. 이때 그 책을 다시 보면 된다. 다시 보게 된다면 처음 읽었을 때 보다 더 술술 읽힐 것이다.

만약 본인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어려워한다면 책의 목차를 보고, 해당 목차 파트의 페이지만 읽어도 충분하다. 그거면 된다. 다 읽고 나서 그 책을 더 읽고 싶어지면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된다. 안 궁금하다면 그냥 그 책을 놓아주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책을 읽을 때 너무 분석하면서 안 읽어도 된다. 왜냐하면, 분석하다가 지쳐 쓰러질 수도 있고, 분석을 다 하고 다시 볼 때 또 다른 생각이 당신을 괴롭히기 때문에 그냥 물 흐르듯이 쭉 읽으면 된다. 굳이 다 기억 안 해도 된다. 예를 들어 <충무공 이순신 전집>을 읽고 나서 ‘이순신이 원균과 갈등이 있었구나,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대성공을 거뒀구나,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구나’ 이 정도만 알아도 된다. 어느 날 이순신이 다시 떠오르면 다시 <충무공 이순신 전집>을 다시 읽으면 된다.

책을 읽는 이유는 ‘번뜩임’ 때문이다. 문장 하나를 더 읽었는가 아닌가의 차이로 문장력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좋은 문장을 읽었기 때문에 그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본인의 재해석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이 ‘탁’하고 떠오르면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된다. 정말 쉽다.

물론 책을 읽게 된다면 넷플릭스도 못 보고, 유튜브도 못 보고, 게임도 못 하고, 핸드폰도 못 만진다. 더구나 300쪽이 넘는 책을 읽어야 한다면 악으로 깡으로 읽어야 한다.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다.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된다. 현재만 행복해도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A’처럼 본인이 주체적으로 시도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만 산다면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객체적 인간’으로 살 것이다.

뱀이 있는 곳에 산딸기가 있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위험과 성공의 공존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위험으로 다가오는 것은 ‘책’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동안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귀찮지만 똑똑해지고 성공하고 싶은가? 애석하게도 뱀이 없는 곳에는 산딸기가 없다. 이게 현실이다.


참고자료


“"책 안 읽는 한국인"…성인 절반 이상 1년에 한 권도 안 본다”, <한경닷컴>, 2022.01.14.,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011403537(2022.02.04.).

“독서는 삶의 힘”, <매일신문>, 2022.02.03.,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2020310271681835(2022.02.03.).

이현우(2020),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교유당.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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