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둘째는 울어도 예뻐.”
친하게 지낸 동료 선생님이 둘째를 낳았다. 코로나로 불안한 시간을 보내며 버티고 버틴 보상으로 기쁘게 새 생명을 맞이했다. 생후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기는 참으로 예뻤다. ‘우리 봄이도 저럴 때가 있었지’ 땅에 디딘 적이 없어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발, 주먹을 꼭 쥐고 있어 쿰쿰한 냄새가 나는 손바닥, 짧디짧은 손가락과 발가락, 우유 냄새가 나는 몸, 안아 들기가 무서울 정도로 작은 아기. 아기를 보고 있으니 봄이가 저만할 때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데도 느긋한 동료 선생님을 보며 과연 역시 키우는 엄마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키울 때는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뭐가 불편한지, 어디가 아픈지, 힘든지, 온갖 걱정이 들어 달려가 살폈을 텐데.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려는 둘째 아기를 보면서도 다급하지 않은 저 여유란. 둘째는 울어도 예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 경험해봐서 여유가 있다는 거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봄이를 돌보며 겪었던 일들, 생각, 감정이 떠올랐다.
봄이를 낳을 때 꼬리뼈가 어찌나 아팠던지. 배가 아픈 것보다 꼬리뼈가 아파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봄이를 낳고도 한동안은 꼬리뼈 통증 때문에 바로 누워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엉덩이를 제대로 대고 앉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봄이가 보고 싶어 절뚝이며 신생아실에 걸어갔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만져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혹시 누워있지 못해 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어 더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뒤돌아섰던 안타까움이 통증도 잊게 했던 그 기억.
내 아이를 내가 돌보지 못하고 수유콜 올 때만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참 우울했었다. 분명 조리원은 천국이라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우울해져 하루라도 빨리 조리원을 탈출할 꿈만 꾸었다. 작고 귀여운 내 아기. 분명 배가 고팠을 텐데 엄마 품에만 안기면 잠들었던 아기. 조금이라도 내 젖을 먹이고 싶어 발바닥도 간질여보고 허벅지를 조물조물 해보았지만 잠에서 깨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아기를 온전히 내 손으로 돌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나 아기는 예뻤고, 나 혼자 아기를 돌보게 될 때의 어려움을 그땐 상상하지 못했다.
바라마지 않았던 조리원 퇴소하는 날, 4월이라 봄기운이 완연한데도 추울까 서툰 손놀림으로 겉싸개까지 감싸주었다. “이제 우리 집에 가는 거야. 우리 즐겁게 지내자.” 잘, 그것도 행복하게 돌보겠다는 다짐 섞인 말을 봄이에게 속삭여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만삭의 몸에 진통으로 힘겹게 나섰던 집에 조그만 아기와 함께 들어가는 기분이 묘했다. 기쁘기도 하고 왠지 낯설기도 하고. 나도 이런데 아기는 얼마나 낯설까 싶어 더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로 조심히 바닥에 눕혀 주었다. 그러며 동시에 든 생각. ‘이젠 어떡하지?’
나는 조리원에 있을 때 일부러 모자동실을 신청해서 아기를 방으로 데리고 와 돌보았다. 모자동실을 의무적으로 하게 하는 조리원이 있다고 하던데 내가 있던 곳은 요청해야 모자동실을 할 수 있었다. 2주 있는 동안 모자동실을 한 산모는 보질 못했다. 지금 푹 쉬며 몸조리를 잘해야 집에 돌아가자마자 시작될 육아를 몸 건강히 해낼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겠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난 일요일에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산후도우미는 다음 날인 월요일에 오시기로 한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 기저귀도 갈 줄 몰라 쩔쩔매긴 싫었다. 특유의 쑥스러움 때문에 간호사님께 기저귀 가는 법을 묻진 못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어떤 순서로 어떻게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눈으로 익히고 모자동실을 이용해 손으로도 익혀볼 요량이었다. 너무 느슨하진 않나, 불편하진 않을까, 기저귀 한 번 갈아주는 데도 요리조리 뗐다 붙여다 하며 이것도 이리 어려우니 앞으로는 어쩌나 막막해졌다. ‘엄마니까 어떻게든, 뭐든 하겠지.’라는 일종의 자기암시처럼 되뇌며 자신감을 얻으려 했다.
기다리던 조리원 퇴소 날, 기쁨과 설렘, 두려움을 안고 아주 작은 아기와 집으로 향했다. 이제 막 집으로 들어섰을 때 이제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롯이 남편과 내가, 아빠와 엄마가 이 조그만 아기를 돌봐야 했다. 아기 목욕은? 이모님께 배워서 해보기로 했다. 아기가 똥을 싸면 엉덩이 씻겨야 하는데? 일단 물티슈로 최대한 깨끗하게 닦고, 이 역시 이모님께 배워서 해보기로 했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기가 울면 안아주고, 졸린 것 같으면 재워주고, 배고파하면 젖을 먹여주는 것뿐이었다. 아, 모자동실 하며 익힌 기저귀 갈기 정도까지. 아기와 집으로 온 첫날, 얼른 일요일이 지나 월요일이 오기를 바라며 하얗게 밤을 새웠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기 젖을 먹이고 트림시키고 다시 재우고를 반복하다 보니 잠잘 시간이 없었다. 1시간 간격으로 아기는 깼는데 젖 먹이고 트림시키고 다시 재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분 남짓 되었다. 내가 누워서 잘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였으니 눈만 감았다 하면 아기가 깨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때는 몰랐다. 한참을 머리끈도 풀지 못하고 잔 것 같지도 않은 선잠 자는 생활을 오래하게 되리라는 것을. 남편은 다음 날 출근해야 하니 거실에서 혼자 자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혼자 참 외로운 시간을 견뎠구나 싶다. 피곤하고 막막했던, 그리고 엄청나게 길었던 밤을 아등바등하며 보낸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기다리던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오시고, 2주간은 밖이 환한 시간이나마 의지하며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어두워진 밤에는 혼자였지만.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아기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주는 압박감이 얼마나 크던지. 나는 이제 막 아기를 키우기 시작한 엄마인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성애는 애 여럿 키워본 엄마처럼 아기를 돌볼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지만, 아기를 돌볼 때 필요한 여러 일 중 몇 가지만 참여했다. 아기가 100일이 되기 전까지는 아기 목욕시키기도 내 몫이었는데 남편이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서워서였다. 나라고 안 무서울까. 도우미 이모님이 목욕시키는 모습을 꼼꼼하게 지켜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해봐도 막상 하려니 무서웠다. 혹시나 떨어뜨릴까 봐, 귀에 물이 들어갈까 봐, 손에 힘이 빠져 아이를 놓칠까 봐. 그래도 엄마니까 했다. 머릿속으로는 ‘엄마니까 두려워하면 안 돼’를 무한 반복하면서.
그때는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는 일에 집중하느라 남편과의 대화에 소홀해졌는데 그러다 보니 남편에 대한 불만(남편은 나에 대한 불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어 안에서 쌓여만 가는 걸 방치하게 되었다. 불만이 너무 많이 쌓여 남편 얼굴이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남편에 대한 연민으로 그 불만을 덜어내려고 했다. ‘그래. 아빠는 엄마랑 시작부터 다르니까. 나야 열 달을 애지중지 품으며 엄마가 될 준비를 해왔지만 남편은 아니었잖아. 이 상황이 나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어. 아빠가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나보다 더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을 거야. 감각적으로 느껴볼 일이 별로 없었을 테니까.’라며 필요했던 이해를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
나름대로 애쓴 것에 비해 별로 위안은 되지 않았는데 당장 책임져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의지할 곳 없이 난관에 부딪히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긴장을 놓을 수도, 잠을 푹 잘 수도, 아픈 몸을 쉬게 할 수도 없는 일상이 계속되니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내겐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어떤 일이든 처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버겁게 마련이 아닌가. 더군다나 아이를 처음 키우는 초보 부모는 오죽할까. 한 생명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설렘과 기쁨, 사랑과 같은 감정과 맞먹는 정도의 불안, 압박,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일상 속에 공존했다. 작고 연약한 아이는 의지할 상대를 매번 나에게서 찾았는데 그 의지를 마냥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나도 연약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퇴근 후나 주말에 약속 하나 잡지 않고 집에 붙어 있었다. 혹시나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빠지려 애썼고, 붙잡혀 가게 되면 빠져나올 궁리를 하며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노력이 혼자 아이를 돌볼 나에 대한 배려이자 의지하라는 신호임을 알았지만 나의 바람은 언제나 이보다 더 큰 것이었다. 아이를 온전히 책임져주었으면 하는 것. 내가 아이에게서 단 하루라도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막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온 데도 못 했을 테지만(아직도 아이와 떨어져 자본 적이 단 하루도 없다). 지금 당장 실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남편이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매번 해주는 “힘들지?”라는 말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 말에 이어 “이번 주말에는 어디 혼자 가서 하룻밤 자고 와. 내가 봄이 볼게.”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남편은 그 말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가 한참 지난 후에야 해주었다.
지금 남편은 혼자서도 아이를 잘 돌본다. 내가 일하랴, 자기계발 한다고 벌여놓은 일 수습하랴, 집안 일하랴, 아이 챙기랴 지쳐 보이면 나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제법 자주 말해준다. 남편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온 세상이 들썩이던 2020년, 1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이를 홀로 돌보았다. 덕분에 복직하여 워킹맘이 된 나는 다소 편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없이도 이제 막 돌이 된 딸을 안전하게 돌보는 남편을 보며 그도 아빠로서 아이를 돌보는 힘은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아이를 낳자마자 직장에 다니겠다고 남편 혼자 갓난아이를 돌보라고 했다면 그는 해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해야 했고, 내가 그 일을 해냈을 뿐이다. 1년간의 육아휴직으로 남편은 아이 일에 관련해 할 수 없는 일이 없게 되었다.
남편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이해해보겠다며 내가 모든 일을 다 감당하려 했으면서도 속으로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키워왔던 그 시간이 참으로 길었다. 그것이 지금은 자못 아쉽다. 그때는 일 마치고 집에 와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과 함께 힘들어 죽겠어도 남편에게 아이 돌보는 일을 일임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측은지심이 온통 마음속을 헤집어댔다. 누군가 한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원망의 대상은 언제나 남편이 되었다. 밥 먹는 모습도 보기 싫었을 정도로 나는 남편을 미워했다. 차라리 눈 질끈 감고 남편이 책임질 일은 떼어내어 넘겨줬어야 했는데. 엄마의 처음과 아빠의 처음에 차별점을 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끙끙대며 참거나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터놓고 이야기해야 했다.
지금은 불만이 어느 정도 쌓이면 털어놓곤 한다. 바로바로 내뱉기는 어려워 미워지려 할 때쯤 이야기한다. 이것까지 말하자니 내가 쪼잔한 사람으로 느껴져 묻어두었던 것들도 가끔 꺼내어 놓는다. 이전엔 속내를 말하는 것이 불편해 꾹꾹 참는 게 더 쉽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말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진다. 이런 일도 하다 보면 느나 보다.
봄이를 함께 키운 시간이 길다면 긴데도 여전히 합의되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 아니, 아이가 커갈수록 새로이 합의해야 할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합이 잘 맞아가고 있는지 이전과 같은 큰 갈등이 생기진 않고 있다. 나는 엄마로 사는 것이, 남편은 아빠로 사는 것이 조금 익숙해진 덕분인 것도 같다. 이 생각은 나의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1살 아기의 엄마, 아빠가 처음이었던 것처럼 4살 아이, 5살 아이(올해로 벌써 5살이나 되었다)의 엄마, 아빠도 처음이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처음 겪는 일에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여, 혹은 아예 상황이나 문제조차 인식하지 못하여 우리 관계가 삐거덕거릴 때도 있다. 앞으로 6살 아이의 엄마, 아빠를 처음 맞게 될 것이고, 유아를 벗어나 어린이, 청소년, 성인이 된 봄이의 엄마, 아빠가 될 것이다. 지금은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겪게 될 터다. 남편과의 관계는 지금처럼 종종 불편해질 것이고. 그럴 때면 우리가 겪어온 갈등을 떠올려 보려 한다. 서로 말하지 못해 쌓아왔던 불편한 감정들과 그 결과를 되새겨 보련다. 그러면 우리는 대화를 할 것이고 서로 의지하며 봄이를 잘 키우려고 애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