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계획된 거대한 발걸음

by 천동원

H는 사무실에서 행정적인 업무를 하다가도 지난번 마약 사건에 대한 허탕질이 항상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쐰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드는 사건이었고, 일에 대한 사명감의 의지를 일순간 허망하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가끔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팬더와 불곰 그리고 흰머리 독수리 모두가 아는 결과를 호랑이와 삼족오 팀들만이 모르고 있었다는 분함이 강하게 뒤통수를 내려쳤기 때문에 억한 심정이 더 컸다. 더욱이 기밀 유출자가 석방될 거라고 말했던 J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삼족오팀들도 어느 정도 사건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소리라도 지르며 머리를 뜯고 싶었다. 호랑이팀만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끝난 뒤에 열린 평가회에서 문제와 대책, 시사점 및 반성 등으로 항상 정보기관 내에서 모두가 반추를 한다. 그래야 정보활동이 더 개선되어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문제점은 여러 나라 정보기관들이 각자의 극비밀주의로 일관된 호랑이팀의 허탕질이었다. 더 대외적인 정보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윗선의 반응은 덤덤하였다. 현장에서 일하는 요원들의 그런 목소리는 응당 매번 있는 볼멘소리라는 시큰둥함이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사람은 현장을 보는 매서운 눈초리보다는 예산이나 인사와 같은 조직의 운영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게 맞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머리와 책상에서 굴리는 머리는 따로 있기는 하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중국이 고대역폭메모리를 자체 생산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게다가 상업용으로 이미 사용 중이며 군사용으로 확대 사용할 거라는 중국발 뉴스였다.



미국의 정보 당국의 사무실에서 몇 명은 그 뉴스를 보며 승리와 확신의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중국이 빼내어 간 고대역폭메모리 나노칩은 미국으로부터 나온 칩이었다.



그 나노칩에는 1/1000 크기인 피코칩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면 메모리를 보조하여 성능을 향상시키는 역할자로 보였다. 그러나 그 칩은 스파이 칩으로 설계도상 전류조절장치로 되어 있었다.



그러한 칩의 실질적 작동 내용은 미국의 칩 제조 회사와 미국 정부만이 아는 탑시크리트였다. 스파이 피코칩은 데이터마이닝을 위한 칩이었다. 지구 자전축이 들썩거릴 이런 정보를 그들이 동맹국이라고 한들 알려주기는 만무하다.



허공에 떠다니는 대화와 문장에서 핵심 단어를 추출하는 데이터마이닝은 전기 콘센트에 장비나 기기가 연결되어 있는 한 24시간 365일 감시가 가능하다. 그리고 정보의 빠른 속도와 민첩한 전달, 그리고 명문화된 정확성을 갖고 있다. 결국 흰머리 독수리의 프리즘이라는 정보 활동은 스파이 피코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이 빼내어간 HBM 설계도와 시제품에는 스파이 피코칩이 부착되어 있었다.



흰머리 독수리는 팬더가 있는 감시와 통제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정치적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비판 욕구는 소규모적인 모임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 얼마든지 드러내며 그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 그것을 염탐하고 동향을 파악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응집시키는 것은 상황 조성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이 집단 행동화로 나타나면 데모가 되고 시위가 되며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정부체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흰머리 독수리가 팬더의 내부나 외부에서 그들의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을 속속들이 안다는 게 중요하다. 협상이나 상황 대처에서 이미 한 발 먼저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흰머리 독수리는 전 지구를 대상으로 빅브라더의 자리를 지키려는 계획된 거대한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멜깁슨 주연의 영화 ‘컨스피러시’에서 주인공의 대사가 생각난다. “내 귀에 도청 장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