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흰머리 독수리

by 천동원

러시아 선박에 식품을 실으려고 했던 그 순간, 그리고 형사와 경찰들이 러시아 선박을 조사하던 그 시각, 팬더 중의 한 명은 서울의 모호텔 커피숖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팬더나 첩보원들이 만남 장소로 대중이 많은 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공공장소가 상대방의 폭력과 살해 위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더는 돈이 든 가방을 주고 그 한국인은 서류가 든 가방을 건네주었다. 서로 확인하고는 5분 정도 잡담도 아닌 말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이후에 알려진 것은 정보상황실 간부급만 볼 수 있는 대외비였다. H가 그 사실을 알기까지 국가적 이해 충돌이 있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꽤 시간이 지나간 후였다. H는 J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다.



러시아 선박은 모든 정보 자산의 눈을 쏠리게 하기 위한 미끼였으며, 호텔에서 팬더에게 건네진 가방 속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설계도와 초기 제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 한국인은 모회사의 고위 간부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회사 기밀 누출로 구속 상태라고 했다.



그러나 J는 애매모호한 말을 덧붙였다. 설계도와 시제품을 건네준 한국인은 곧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미국 정보국이 관여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들은 흰머리 독수리로 불렸다.



작전 초기에 1팀장과 차장이 회의실에서 싸운 것도 증거 소멸 전에 마약을 밀매하는 팬더를 잡자고 했던 1팀장과 더 기다리라고 했던 차장의 의견 충돌이었다.



차장은 실장의 지시를 받고 시간을 지연시킨 모양이었다. 그럼 실장은 누구로부터의 지시로 수사를 연기했을까? 더 높은 직위의 사람? 국가 간 정보교환과 협의를 할 수 있는 정보국 최고 책임자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팬더들은 현재도 그렇지만 대만과는 향후 지속적인 협력이 가능하기에 양안관계를 위해서라도 대만의 T 반도체 회사가 중국으로 기밀을 유출했다는 스파이 혐의를 받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에 한국은 한두 번 사용하고 얼마든지 내던져 버릴 패였다. 그러기에 한국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설계도와 실물이 필요했다.



모든 국가는 국가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 이익이 타국가에게는 불법적 손해를 끼칠 수 있다. 그래서 국가 간 첩보전에서 얻은 정보와 상황을 바탕으로 국가는 능동적인 외교적 협의와 상호 간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H는 미국 연수 중에 흰머리 독수리들로부터 교육받은 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모든 전파통신 감청에서 필요한 것만 뽑아내어 정보를 분석한다. 이러한 과정을 프리즘이라고 한다.



하나의 흰 빛이 여러 가지 파장의 분명한 색으로 분리된다. 우리는 불분명한 것을 선명하게 나타나게 하는 능력, 즉 상황의 분석력과 정확한 판단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팬더가 J와 H의 혼을 빼놓는 사이에 흰머리 독수리(미국 정보원)가 뭔가를 낚아채 간 것 같았다. 이번 작전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라고 H는 생각했다.



J와 H는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다. 서로 그냥 웃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