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겨울, 로맨스
여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 흔히들 사계절을 읊을 때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말하지만, 사실상 한 해의 끝자락도 새로운 시작도 모두 겨울이다. 나이가 바뀌는, 그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는 계절을 사랑한다. 펑펑 흰 눈이 내리는 것은 언제나 예쁘고 (아직 차가 없어서 그럴지도) 카페와 길거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들뜨게 만든다. 캐럴을 듣는 것 역시 좋아하고,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붕어빵 가게까지 모두 반갑기 그지없다. 심지어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 그러니까 뇌까지 얼어붙는 느낌도 가끔은 괜찮다. 정신이 번쩍 든달까.
그러나 모두가 이러한 겨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계절 특성상 야외 활동이 적합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자, 이럴 때는 역시 따뜻한 방에서 (전기장판 위라면 더욱 금상첨화다) 이불을 덮은 채 귤 까먹으며 드라마 정주행 하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돌아왔다! 지난여름 편에 이어 이번에는 겨울과 어울리는 드라마 3편을 뽑아 추천하고자 한다. 추운 이 계절 대리 만족할 수 있도록 로맨스가 가득한 드라마들로 골라왔다.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드라마는 역시 <파스타>이다. MBC의 ‘여름’ 하면 <커피프린스 1호점>이고 ‘겨울’ 하면 <파스타> 아닌가! #엄격_근엄_진지. 지금 다시 보면 떽떽 화만 잔뜩 내는 남자 주인공이 멋없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이유는 ‘공블리’ 공효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녀가 “예, 솁”이라고 말할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는가. (<파스타>를 보는 순간 왜 ‘공블리’인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악역도 없는 따뜻한 이 드라마는 겨울 날씨 중 천천히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과 포근함을 떠올리게끔 한다. 와중에 모두 다 연기를 어찌나 잘하는지, <커피프린스 1호점>과 마찬가지로 어느 레스토랑에 실제 그런 커플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엔딩 장면이 드라마답지 않아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보다 보면 ‘여기서 끝난다고요?’ 싶을 때가 간혹 있을 텐데 놀라지 마셔라, 이 드라마만의 매력이다. 참고로 온갖 맛있어 보이는 양식 요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한밤중에 보면 미칠 듯이 야식이 땡길 수 있다. 다이어트하시는 분들은 조심하시길 바란다.
너 연애 한 번도 안 해 봤지? 눈치 보지 말고 하자, 나랑.
1화부터 남자 주인공이 “기억해, 내가 너한테 반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 드라마, 첫인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지성이 화보에나 어울릴 법한 짙은 메이크업을 한 채로 드라마에 나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인소’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사는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지만, 2화를 보고 내 미래를 알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위해 사라져야만 하는 인격 신세기가 “내 눈빛을 절대 잊으면 안 돼” 하는 순간 짐작했다. ‘아, 이 작품 때문에 꽤 울겠구나’라는 사실 말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마침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따뜻한지 눈물 정도가 아니라 오열해버렸다. 그러나 20부작 내내 슬프지만은 않다. 중간중간 깨알같이 웃음 포인트들이 배치되어 있고, 완급조절이 매우 탁월한 편이기 때문이다. 스토리 이외에도 7개나 되는 인격들을 전부 다 훌륭하게 소화해 낸 지성 씨의 굉장한 연기력과 남매 역할임에도 이때부터 남달랐던 황정음 씨와 박서준 씨(둘은 이후 <그녀는 예뻤다>를 찍게 된다. 앗! 이 작품도 MBC 아닌가)의 케미까지 여러모로 보는 재미를 두루두루 갖춘 작품이다. 울다 웃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진하게 한번 빠져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내 마음이 조각나지 않았던 건
아마도 차도현 씨 덕분일 거야.
미안해요. 나 때문에 마음이 조각나게 돼서.
앞서 소개한 드라마들 모두 20부작이다. 솔직히 정주행 하자고 쉽게 결심할 수 있는 분량은 결코 아니다. 자, 그렇다면 10분의 1 정도 되는 단막극은 어떨까. <빙구>는 최근 종영한 tvN <날 녹여주오>와 동일한 소재, ‘냉동인간’을 앞세운 이야기이다. 1979년에 살던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냉동인간이 된 채 37년이 흐르고, 2016년에 다시 깨어나게 된다. 물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올랐고, (무려 오백 원짜리 ‘지폐’를 내밀던 주인공이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 노인이 되었으며, (심지어 친구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본인의 직장은 물론 직업 자체가 사라졌다. (참고로 영화관 간판을 그리던 간판장이였다) 그렇다. 37년은 사람이고 장소고 추억 속에나 존재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시간이란 친구는 제법 무섭고 잔인해서 모든 것이 과거가 되도록 흘러가게끔 만드는데, 우리는 왜 이토록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열심히 현재를 사는 것일까. 이 작품을 보면 현재의 가치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현실에 치여 지친 나머지 ‘현타’를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 특히 좋을 듯하다. 작가님이 장치를 참 똑똑하게 설치해 두셔서, 곱씹어 볼 지점들이 여럿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요. 우리가 사랑했단 사실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겨울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를 정리해보았다. 분명 처음 목적은 대리 만족할 수 있는 로맨스를 추천하는 것이었는데, 어쩐지 로맨스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더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들이다. 그나마 <파스타>가 의도와 가깝지만,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워낙 강한지라 설렐 수 있을진 모르겠다. 원래 글이란 게 초기 의도와 달라지는 것 아니겠는가. (웃음) 어쨌든 여름과 마찬가지로 배우와 제작진분들은 열악한 날씨 속에 촬영하느라 고생 많으셨겠지만, 보는 우리는 참 예쁘기만 하다. 이번 글 역시 여러분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해 버티느라 수고 많았던 자신에게
드라마와 함께 선물 같은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