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하게 달려온 사람들 중 본고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하여.
프롤로그
2018년 9월 19일.
뉴스에서는 실질적인 '종전'을 알리는 속보가 검색어를 오르내리고 있네요. 각 분야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거기에 조금 다른 사연을 덧붙여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공식적으로 PEET 성적이 발표된 날이기도 하거든요. 저도 나름대로의 전쟁을 끝내는 기분으로 키보드를 잡습니다.
실제 응시자가 14,892명이라고 하는군요.
서류대를 제외하면 매년 통계적으로 1,200명 정도가 합격하는 시험이므로…
오늘도 어딘가에서 1,000여명은 웃고 나머지 14,000여명은 울어야 하겠지요.
다만, 그중에 올 한해를 부끄럽지 않게 보냈던 사람들 있을 겁니다.
누구보다 간절했고, 절실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결과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부터 닿지 못할 위로를 적어보려 합니다. 사실 지난 날의 저에게 보내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자기소개
우선 제 소개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 경우 올해 75문항을 맞았습니다. 백분위로는 370 정도가 나오는군요. 갑자기 왜 묻지도 않은 결과를 얘기하느냐. 결국 세상은 결과를 통해서 제 말에서 설득력을 찾을 것이므로...(작년 입시 후 제가 이런 얘기들을 해 보았자, 그걸 듣는 누구라도 저를 치졸히 여기고 비웃지 않았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작년 얘기를 해 볼까요. 작년을 기점으로 모의고사 점수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화학의 경우, 백분위로 90 밑으로 떨어진 회차가 없었고 유기와 생물은 85-90 선을 왔다갔다 하더군요. 고양이의 경우 작년 기준 이미 두권씩 풀었고 그걸 신줏단지처럼 모셨던 기억이 납니다. 써머리는 너덜너덜하게 보았고 파이널도 10퍼컷 안으로 늘 들었어요. 느낌이 좋았죠.
그러니까 시험을 조진다는 건, 이 시점에 본고사에서 60정도의 백분위를 받는 것이잖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작년 본고사를 조졌어요. 화학과 물리는 95를 넘기고 유기는 90, 생물에서 60대의 백분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제 얘기를 시작해 보려고 해요.
간절한 꿈은 이루어질까
그래서 무엇부터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일반생물 시험지를 펼쳐보고 원인분석을 했습니다. 저도 제법 정량적이고 분석적인 종류의 사람이라 지난 시험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어요. 제 결론이 뭐였냐구요.
"1년을 더 공부해도 두 문제 이상은 더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1년을 더 공부한다고 해서....제가 답을 도출해내기까지 거쳤던 어떤 논리들, 그것들이 바뀔 것 같진 않았어요. 지금에서야 용기내 꺼내보는 얘기지만 어디까지나 모자란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기출문제가 꼭 명쾌하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을 주변에 펼쳐 놓아봤자 돌아오는 말들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럼 결국 고득점을 얻는 사람들은 뭐냐.."
"어딘가 문제가 있겠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는 않을 것…"
"노력이 부족했겠지 누군가는 너보다 절실하게 했겠지…"
"충분히 간절하진 않았던 모양…"
혹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모든 것이 다 어딘가에 쓰인다."
"더 좋은 약대를 가기 위해 하늘이 마련한 큰 계획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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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 게 뭐예요.
그런 얘기들이 들릴 땐 그 말을 해주는 사람들의 선의를 이해하면서도....구겨지는 인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노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들,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얘기들, 꿈은 이뤄진다는 식의 얘기들, 간절히 꿈을 그리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얘기들….
그만큼 명쾌하고 손쉬운 진단이 없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그 말들은, 딱 그만큼 문신처럼 선명하게 남아 저를 괴롭혔어요. 모자란 결과 앞에서, 그 예쁜 말들만큼 폭력적인 말도 또 없을 겁니다.
꿈은 이뤄진다면서. 내 꿈은 결국 꿈이 아닌 것인가.
내가 책상 앞에서 보낸 세월은 노력도 아니고 간절함도 아닌 것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하늘에게 그럼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나는 도울 수 없던 것인가…
비관과 비통함으로 보낸 1년
저는 그런 1년을 보냈습니다. 비관과 비탄에 잠겨서 한 해를 보냈어요. 이번에도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는 마음이 시험 전날까지 고개를 빼꼼 내밀었습니다. 작년 같았으면 저도 나름대로 긍정의 뿅망치로 그것들을 내리쳤을텐데 올해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자꾸만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버려 두었어요.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사회는 제 성적표를 두고 명쾌한 진단을 내놓았을 지도요. "그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1년을 보냈는데 잘 될리가 없잖아." 라는 식으로요.
어쨋든 결과적으로는 점수가 제법 나온 모양이고 이제 세상은 "그것 봐, 그전에 해둔 것이 있으니 이렇게 보상받잖아". 라는 식으로 결과를 손쉽게 해석할지도 모릅니다.
길이 너무 길어졌으니 이제 제 모자란 결론을 말씀드릴게요.
우리의 결과와 이유,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관하여.
그러니까 그간 간절히,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달려오셨던 분들에 한정해서…
이번에 결과가 좋지 않은 분들, 시험지를 다시 펼쳐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잘못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정말 누구보다 절실히 노력했지만
결국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요.
세상은 이해해주지 않을 이야기지만,
주변에서도 끝내 믿어주지 않겠지만…
여러분은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결과를 받아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건 시험을 잘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운에 관한 얘기는 본능적으로 꺼립니다. 우리 인생은 도박이 아니므로, 그런 불확실한 것들에 나의 소중한 꿈을 매달고 항해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누구나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앞을 알 수 없는 경우 불안을 계획으로 채웁니다. 비관적인 지표 앞에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외면하려 하지요.
그래서 어떤 결론이, 팔자소관이나 운을 통해 끝나게 되면 허탈해합니다.
동시에 그런 결론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인과율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이 마련한 논리입니다. 수많은 역사가 그랬고, 당장 우리가 존재하는 생태계 역시 인과관계로는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저명한 학술지에서는 암의 원인으로 '운'이라는 요인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사실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지배하는지에 관한 담론은 20세기부터 진행된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괴델의 불완전성 논리가 그렇지요. 오래전부터 우리를 지배해 온 논리구조를 우리는 오래도록,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로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올해 부로 이 바닥을 떠나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시험에서 운이라는 요소는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운이란 것은 비단 답을 찍는 것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작년 생물의 경우 식생분진에서 기형적으로 많은 문항이 출제되었잖아요. 제 경우, 전공도 그렇고 분자생물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었는데, 출제되는 단원이랄지, 그날의 컨디션이랄지, 고사장 옆자리에서 다리를 떠는 사람이랄지, 그로 인해 내 머리속에서 생겨나는 여러 잡념들과 그간 길러온 여러 개념들의 상호작용이랄지, 그 모든 게 어떤 면에선 '운'의 소관일지도 모릅니다.
세월호는 분명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입니다.
하지만 죽은 아이들이 꼭 단원고의 그 아이들이어야 할 이유같은 건 없습니다.
그딴 게 무슨 하늘의 큰 계획이겠습니까…
당사자들에게는 그저 비극일 뿐일 겁니다.
모든 일에 제각기 대응되는 단일한 이유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행여 이유란 게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명쾌하고 단일한 종류의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는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포도넝쿨처럼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샤프 꼭지에 지우개가 딸려 오듯이, 어떤 결과에 반드시 원인이 붙어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제가 작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거든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내뱉는 낙천적인 말들에 상처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딘가에 저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글을 남깁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위한 글이기도 하고요.
결과는 우리 몫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마 작년에 제가 합격했더라면 저도 쉽게 얘기했을 겁니다.
결과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어딘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요.
잘 분석해보면 분명히 공부법이 잘못됐을 거라고, 혹은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만큼 절실하지 않았고 나만큼 간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요.
하지만 이제야 조금은 알아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새치기를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줄이 바뀌면서 우연히 제일 앞줄에 서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그 결과에 맞춰 오만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종종 본인의 행운을 실력으로 여기고, 본인의 불운에는 이유를 특정하려 노력합니다.
올해도 결과 앞에서 억울하고 분에 겨운 사람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감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 분들을 위로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말로 표현할 수 없이 머리속에서 안개처럼 떠도는 관념들을 전하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우리들의 결과에, 이유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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