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의 상인들은 어떻게 실크로드를 지배했나

중세 금융 시스템의 탄생지를 걷다

by Miracle Park


1. 서론: 실크로드의 금고, 부하라


"부하라를 제외한 온 세상이 빛을 잃어도, 부하라는 스스로 빛을 낼 것이다."


10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다키가 남긴 이 찬사는 과장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도시 부하라는 9세기부터 16세기까지 실크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 중심지였으며, 단순한 무역 거점을 넘어 중세 금융 시스템이 꽃핀 혁신의 무대였다.


부하라 상인들은 중국 장안에서 지중해 베네치아까지 1만 킬로미터가 넘는 무역 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현금을 들고 다니는 위험을 피하고자 어음(suftaja) 시스템을 개발했고, 환전상(sarraf)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화폐를 실시간으로 교환했으며, 신용장과 공동 투자 방식으로 대규모 캐러밴 무역을 조직했다. 이러한 금융 기법들은 훗날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전해져 유럽 은행업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6년 현재 부하라 역사지구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래 140개 이상의 건축 기념물을 보존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25년부터 '부하라 5000년' 기념사업을 본격화하며 실크로드 금융 박물관 건립, 옛 캐러반사라이의 부티크 호텔 전환, 전통 바자르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고대 상인들의 혁신 정신이 현대 문화관광 산업으로 부활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2. 부하라 상인의 황금시대: 9-16세기

2.1. 지리적 이점과 무역 네트워크

부하라는 자라프샨 강 하류 오아시스에 위치하며, 실크로드 주요 경로 중 '중앙 루트'의 핵심 결절점이었다. 동쪽으로는 사마르칸트와 카슈가르를 거쳐 중국으로, 서쪽으로는 메르브와 테헤란을 거쳐 중동으로, 남쪽으로는 발흐를 거쳐 인도로, 북쪽으로는 키예프를 거쳐 러시아로 연결됐다. 이 '사방팔방 교차로' 입지가 부하라를 상업 허브로 만들었다.


9세기 사만 왕조(819-999) 시대에 부하라는 페르시아 문화권의 수도로 전성기를 맞았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프라이(Richard Frye)의 연구에 따르면, 10세기 부하라 인구는 30만 명으로 당시 바그다드(50만), 콘스탄티노플(40만)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였다. 도시에는 대형 캐러반사라이(숙박 시설) 60개 이상, 상설 시장 200개 이상이 운영됐다.


부하라 상인들의 활동 범위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하우칼은 "부하라 상인을 중국 광저우, 인도 캘리컷,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모두 만났다"라고 기록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부하라 상인들은 페르시아어, 아랍어, 튀르크어, 중국어에 능통하며 각지에 대리인을 두고 있다"라고 전했다.


2.2. 주요 거래 품목과 부의 축적

부하라 상인들이 취급한 대표 상품은 다음과 같다:


-직물: 중국 비단, 부하라산 면직물(zandaniji), 페르시아 융단이 주력이었다. 특히 부하라 인근 잔다나(Zandana) 마을에서 생산된 비단은 "잔다니지"라는 고유 브랜드로 유럽까지 수출됐다. 9-10세기 부하라 직물 산업 종사자는 4만 명으로 추산된다.


-종이: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공들이 사마르칸트에 기술을 전했고, 곧 부하라로 확산했다. 10세기 부하라는 이슬람 세계 최대 제지 생산지가 됐으며, 아랍어 사본을 만드는 데 필수 자재를 공급했다. 역사학자 조너선 블룸(Jonathan Bloom)은 "부하라 종이가 없었다면 이슬람 학문의 황금시대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석과 귀금속: 아프가니스탄 바닥샨 광산에서 채굴된 라피스라줄리(청금석)가 부하라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됐다. 또한, 중앙아시아산 터키석, 인도산 루비, 페르시아산 진주가 거래됐다. 13세기 부하라 보석 시장의 연간 거래액은 금화 200만 디나르(현재 가치 약 5억 달러)로 추정된다.


-향료와 약재: 인도산 후추, 계피, 정향과 중국산 대황(약재), 사향이 부하라를 통과했다. 11세기 페르시아 의학자 이븐 시나(Avicenna)는 부하라 출신으로, 『의학 정전』에서 소개한 약재 760종 중 상당수가 부하라 시장에서 거래되던 것들이었다.


이러한 무역으로 부하라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2세기 역사가 사마니의 기록에 따르면, "부하라 상위 20개 상인 가문의 자산은 각각 금화 50만 디나르(현재 가치 약 1억 2,000만 달러)를 넘었다." 이들은 사유지에 정원과 분수를 갖춘 저택을 지었고, 마드라사(학교)와 모스크 건설에 기부했다.


2.3. 몽골 침략과 회복

1220년 칭기즈 칸의 몽골군이 부하라를 침략하면서 도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몽골군이 3일간 부하라를 약탈했고, 인구 10만 명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라고 기록했다. 칼얀 미나레트(Kalyan Minaret, 높이 46m)만 칭기즈 칸의 명령으로 파괴를 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하라는 놀라운 복원력을 보였다. 13세기 후반 몽골 제국이 안정되면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는 상대적 평화기가 찾아왔고, 실크로드 무역이 재개됐다. 14세기 중국 원나라 지폐가 부하라에서 발견된 것은 이 시기 무역 활성화를 보여준다.


15~16세기 티무르 제국과 샤이바니 왕조 시대에 부하라는 다시 번영했다. 1557년 샤이바니 왕조의 압둘라 칸 2세가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옮기면서, 16세기 후반 부하라는 "고귀한 부하라(Bukhara-i-Sharif)"라 불리며 중앙아시아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가 됐다. 이 시기 건설된 압둘라 칸 마드라사, 마고키 아타리 모스크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3. 혁신적 금융 시스템: 중세의 은행가들

3.1. 어음(Suftaja) 시스템

부하라 상인들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은 어음(아랍어 'suftaja', 페르시아어 'hawala') 시스템이었다. 캐러밴 무역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금화나 은화로 운반하는 것은 도적의 위험과 무게 부담이 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세기부터 부하라에서 신용 증서 방식이 발달했다.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부하라 상인 A가 바그다드에서 물건을 구매하려 할 때, 부하라의 환전상(sarraf)에게 금화 1,000디나르를 맡기고 증서를 받는다. 그는 이 증서를 가지고 바그다드로 가서, 부하라 환전상과 제휴 관계인 바그다드 환전상에게 증서를 제시하고 현지 화폐로 환전받는다. 두 환전상은 정기적으로 장부를 대조해 차액을 정산했다.


12세기 이슬람 법학자 사라흐시의 법학서 『알마브수트』에는 이러한 거래의 법적 근거가 명시돼 있다. 그는 "수프타자는 이자(riba) 금지에 어긋나지 않으며, 양 당사자가 위험(risk)을 공유하므로 합법적 상업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는 이슬람 금융의 핵심 원칙인 '위험 분담(risk-sharing)'의 초기 형태였다.


미국 경제사학자 S.D. 고이테인(Goitein)의 연구에 따르면, 11~12세기 이집트 푸스타트에서 발견된 상업 문서 중 부하라 상인들이 발행한 어음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는 부하라 금융 네트워크가 지중해까지 확장됐음을 증명한다.


3.2. 환전상(Sarraf) 네트워크와 환율 시스템

부하라 바자르에는 전문 환전상들이 모여 있는 '사라프 구역'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화폐를 교환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 은행의 기능을 수행했다. 예금 수취, 대출 제공, 환전, 송금, 심지어 투자 자문까지 맡았다.

10세기 부하라에서 유통되던 화폐는 최소 7종류였다: 사만 왕조 은화(디르함), 아바스 왕조 금화(디나르), 비잔틴 금화(솔리두스), 중국 동전, 인도 은화 등. 환전상들은 각 화폐의 순도와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을 보유했다. 12세기 부하라에서 발견된 분동(秤) 세트는 0.1g 단위까지 측정 가능했다.


환율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동했다. 13세기 부하라 상인 안내서에는 "가을 캐러밴 시즌에는 중국 동전 수요가 증가해 은화 대비 환율이 10% 상승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시장 경제 원리가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환전상들은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부하라의 대형 환전상은 사마르칸트, 메르브, 바그다드, 타브리즈에 지점이나 대리인을 두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환율 정보, 시장 동향, 정치 상황을 공유했다. 14세기 부하라에서 발견된 상업 서신 모음집에는 "바그다드 환율", "중국 비단 가격", "몽골 관세 변동" 등의 정보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었다.


3.3. 공동 투자(Mudaraba)와 파트너십(Sharika)

대규모 캐러밴 무역은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위험도 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하라에서는 이슬람 상법에 기반한 공동 투자 방식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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