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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Oct 28. 2021

할아버지의 유품

'고대 시조 가투'를 아시나요?

초등학교 6학년 10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홀로 남으셨다. 다섯째 아들 집에서 함께 사셨던 할아버지는 오랜 지병의 천식과 돌아가시기 전 6개월 여 시간 동안 치매를 앓다가 세상을 등지셨다. 할아버지 수발을 드느라 작은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우리 집이 장남의 집이었지만 할아버지를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아 작은집에 할아버지를 모셔두고 아버지는 내내 죄인 된 마음이셨던 것 같다.


부모님은 작은집에서 할아버지를 모시니 생활비를 보내 드렸다. 그래도 장남인 아버지 마음에는 늘 부족한 생각이 드셨던 것 같다. 어머니와 의논하면 다툼이 될 것 같아서인지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리러 다니셨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가실 때마다 항상 나를 데리고 가셨다. 오가는 길 외로우셔서 인지, 부모 섬김을 가르쳐주고자 셨을지, 막내인 내가 어머니와 다툼이 생겼을 때 애교로 무마시켜주기를 원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 한 번 여쭤보았는데 아버지는 달리 답변이 없으셨다. 기억이 없으신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매 달 셋째 주 일요일이 되면 아버지는 작은집으로 나와 함께 동행하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 네 십구 중에서 가장 가난한 편이다.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는 용돈이 아버지 재산의 전부였다. 한 달 내내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서 할아버지께 다 주시는 듯했다. 30년 전, 매월 20만 원씩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으니 엄청 큰돈이었다. 아버지는 3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내가 잊지 않고 있음을 더 신기해하셨다.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다녀오고 며칠이 지나면 영락없이 작은어머니께로부터 전화가 왔다.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 받은 용돈을 받으실 때 넣어둔 곳을 늘 잊어버리셨고, 작은 어머니께 '돈을 찾아내라!' 닦달을 하셨다. 작은 어머니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오셔도 용돈은 주지 마시라 전해 달라'는 내용의 말씀을 매번 하셨다. 그러면 집안이 한 번 더 발칵 뒤집혔다. 아내와 의논 없이 매월 싫다는데도 용돈을 드리러 고집스레 찾아가는 남편도 이해가 안 가고, 반복되는 다툼도 싫증이 날만 하다. 아내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키워주셨으니 할아버지와도 정이 깊을 법 한데 할머니 때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었고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붉은 상자 하나가 보였다. 열어보니 '시조'가 적혀있었다.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있던 상자를 챙겨 들고 30년이 넘도록 갖고 있다. 그 이후 10번이 넘게 이사를 했고, 결혼 후에도 10번이 넘는 이사를 했으니 그 숱한 세월 붉은 상자는 계속 나와 함께 동거 중이다.




TV쇼 진품명품을 보다가 문득 오랫동안 들고 있던 '붉은 상자'가 생각이 났다. 들고만 다녔을 뿐 제대로 펼쳐 본 적도 없던 그 물건이 왜 갑자기 생각이 났을까? 낡은 상자위에 [고대 시조 가투]라고 적혀있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자료를 검색해보았다.


일제강점기에 '가투(歌鬪)'라는 놀이가 있었다. 꽃 모양의 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이 화투이듯이, 이 놀이에는 시조가 적힌 200장의 카드가 있는데, 100장은 종장만 적은 카드이고 나머지 한족은 전체를 적은 카드이다. 창수(唱手)가 종장을 부르면 거기에 해당하는 시조를 제일 먼저 찾아내는 사람이 득점을 하고, 잘못 찾으면 벌칙이 있었다. 일본에 기원을 둔 것이라고 하나, 시를 놀이로 만든 것은 시의 기원이 놀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시의  짝을 맞추는 행위는 사실 동양 전통에서 매우 익숙하다.  

[출처] 놀이와 문학, 문학 치료의 가능성 |작성자 hee jung


화투와 비슷한 카드이고, 100장의 카드는 시조 중 '종장'만 적혀 있고, 나머지 100장은 시조의 '전체'가 적혀있는 카드인데, 한 사람이 종장을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 맞는 시조 카드를 찾아내는 놀이인가 보다.






상자에는 [800 환]이라고 적혀있었다. 카드의 개수는 100장씩 200장이었고 한 장도 분실된 것이 없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가 있는 물건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새 [TV쇼 진품명품]에 감정의뢰서를 보냈다.



언제 적 가투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저 박스에 '800 환'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내가 아는 정보의 전부다. 그런데 감정가가 200~300만 원이라고 했다. 200~300이면 가격차가 무려 100만 원이나 난다. 부르는 게 값인가 보다. 물건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만 본 것이라서 그렇게 감정을 해 준 것 같다. 앵글이와 둘이 카드를 세고 분실된 것이 없는지 확인을 한 후 감정의뢰를 한 것이어서 답변이 오자 앵글이에게 감정가를 알려줬다.


"앵글아~ 시조 가투 2~300만 원이래."

"헐~! 진짜??"

"응. 더 오래 들고 있으면 값이 더 올라가는 거 아닐까?"

"엄마, 아끼다 똥 될 수 있어. 엄마 용돈 필요할 때 가서 팔아."

"아직 급전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일단 갖고 있어 보자."

"그래."

"이거 잘 갖고 있다가 대대손손 유산으로 물려줄까?"

"엄마, 엄마가 이상한 거야. 이런 걸 30년이나 갖고 다니는 게 신기하지. 나랑 동글이한테 주면 당장 가서 팔걸?"

"ㅋㅋㅋㅋㅋ 그렇겠네."




갑자기 '나태주 님의 시'가 떠올랐다.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작은 상자 하나를 30년 세월동안 이고 지고 들고 다녔더니 그 가치가 높아졌다. 집에 금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무심하게 서랍 속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몸값이 올랐어도 애지중지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감정을 의뢰하고 한 달의 시간을 기다려 감정가를 받아내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천덕꾸러기 신세는 면했다.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던 물건이었지만 세월의 흐름 따라 가치가 매겨졌다. 사람 관계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는데 귀함이 사라지고, 함부로 하게 되고,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더 아끼고 사랑하며 잘 지내야겠다.



오래된 물건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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