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무리 지은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 맨 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던 소녀는 외로웠다. 아는 친구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였다.
4학년의 끝무렵 학생수가 너무 많아 분교가 세워졌다. 전교생의 40%가 전학을 권고받았다. 전학 온 지 2년 남짓 되어 이제야 친구를 사귀었고 학교 생활에도 적응이 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또 전학이라니 생각만 해도 싫었다.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지만 남겠다고 했다. 2년 뒤 있을 끔찍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깨가 쏟아지는 아이들을 힐끔힐끔 구경만 했다. 용기 내어 끼어들 성격이 못되었다. 누가 말 좀 시켜줬으면 싶었지만 아이들과 눈 맞춤도 잘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그 아이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모여드는 아이들은 군집을 이루었고, 2교시 쉬는 시간만 되면 모여서 점심을 까먹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종 치기가 무섭게 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그 아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내달렸다. 소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아이들 무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짧은 커트머리, 적당한 키와 체격,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여드름, 쾌활한 성격의 그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 아이는 소년 같은 매력이 있었다. 어느새 소녀는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6학년의 12월. 중학교 배정을 앞두고 아이들은 수선스러웠다. 어느 학교로 배정될지 예측해 가며 서로 내기를 했다. 배정표를 받고 나면 지정된 중학교에 가서 '배치고사'를 치러야 했다.
선생님께서 교실로들어오신 후 이름을 부르셨다. 부름 받은 아이는 교탁 앞으로 나가 배정표를 받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아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드디어 소녀의 차례가 되어 교탁 앞으로 나가니 선생님께서,
"미안해서 어떡하니...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정이랑 같은 학군에 넣을걸... 네가 타 학군이라 우리 학교에서 배정할 수 있는 학교가 없더구나."
배정표에는 듣도 보도 못한 학교 이름이 적혀있었다. 반에서는 소녀 혼자, 전교에서 열 명의 아이들만 배정된 신설학교였다. 4학년 때 분교로 전학하지 않은 아이 10명만 주소지 목록에 해당사항이 없어 무작위로 배정된 학교였다.
같은 학교에서 배정되어 온 아이들은 함께 도시락도 까먹고, 쉬는 시간마다 이반 전반으로 흩어진 아이들까지 모여 신바람이 났다. 오직 소녀만 혼자였다.
소녀의 마음속 그 아이, 늘 쾌활하고 인기 많은 그 아이를 따라 시선이 옮겨졌지만 말조차 건네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같은 반 친구들 중 몇몇 아이들과 말을 트긴 했지만 아직 친구라 이름할 여타의 무리는 만들지 못했다. 소녀는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용기를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오늘 과제물 네가 안 냈길래. 숙제는 다 했지?" "응. 여기..."
그 아이는 반장이 되었다. 그렇게 첫 대화를 나눈 후 35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아이와 나는 절친이다. 35년 동안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단 한 번도 의견이 어긋나 본 적 없는 귀한 친구... 나의 소중한 벗 OOO!
1987년부터 주고 받은 편지들
OO 이에게.
안녕? 로운이야.
'봄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을 떠올려보았어. 너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더라. 가족을 빼고 나의 삶 속에 가장 귀한 사람을 생각해보았어. 한 사람, 한 사람씩 스쳐 지나갔지만 너와의 인연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없더구나. 역시 나의 첫사랑은 네가 맞는 것 같아.
네가 내게 주었던 편지와 엽서들이 파일에 곱게 모아져 있어. 문득 생각이 나서 오래된 책꽂이에서 네 편지를 찾아보았지. 그리고 한 장, 두 장 다시 읽어보았어. 벌써 35년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편지를 읽어보니 그때 그 순간이 다시 떠오르더라. 연애시절을 돌이키듯 설렘이 가득했어.
신기하지 않니? 35년이 흐르는 동안 어떻게 단 한 번의 다툼도, 이별도 없이 지나올 수 있었을까? 너른 네 마음으로 외로움 많던 나를 잘 품어주어서겠지. 그래서 늘 고마워.
중학교 3년을 함께 보내고,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았을 때가 생각나니? 학교가 다른데도 내 생일이 되면 잊지 않고 우리 학교까지 와서 편지와 선물을 주고 갔던 거 말이야. 야간 자율학습이 있던 때라 중간에 나왔다 가려면 외출증도 끊어야 하고, 오가는 길 분주하고 번거로왔을 텐데도 한 번도 건너뜀 없이 찾아와 준 내 친구...
생일이 어버이날이라서 생일이 없던 내게 네가 아니었으면 너무도 슬픈 생일이 될 뻔했지. 그래서 늘 고마웠어. 나는 네 생일을 못 챙길 때도 많았는데 너는 지금도 생일이 되면 우편으로 선물과 엽서를 보내주었지. 네 따뜻한 마음 때문에 외롭지 않은 생일을 보냈던 것 같아. 고맙다. 친구야...
고등학교 앞으로 와서 전해준 카드와 초콜릿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 문득 생각 나는 사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는 언제나 너였어. 열넷의 봄부터 마흔아홉의 봄까지 쭉 말이야. 열넷의 봄을 떠올리다 보니 나의 마음이, 감성이 열넷이 된 것만 같다. 서로의 삶이 분주하여 자주 보지 못해도, 일 년의 한 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우리네 시간 속에서도, 함께할 때면 어제 보고 오늘 본 것 같은 나의 친구...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도 내내 이렇게 사는 얘기 나누며 살아가자꾸나.
이전의 삼 심 오 년을 다툼 없이 살았으니, 앞으로의 오십 년은 함께 여행도 하고, 즐기면서 살아보자. 너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모든 시간들은 선물이고 추억이 될 거야.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하자. 친구야...
늘 먼저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 사랑한다. 친구야...
2022년 3월 21일. 너의 벗 로운이가
보글보글의 봄 시리즈 세 번째 주제 "봄 사람"편입니다.
몇 주 동안 '봄 사람'을 떠올리며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보았습니다.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사람들과 꽤 관계가 좋은 편이라 이번 주제는 글로 옮기기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쓰기 쉬운 글은 없더군요... 많이, 아주 많이 어려웠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떠올렸고,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글로 사람을 옮기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화들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주특기라고 자신했지만 막상 주제로 다뤄지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친구를 떠올리며 옛 기억을 소환해봅니다. 마음이 따뜻해졌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코끝이 찡해지고 진한 감동으로 울림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연의 끈을 하나씩 감아내어 보니 제 곁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음을 깨달아봅니다. 나이가 거듭될수록 남는 건 사람뿐이라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얻은 깨달음은, 참 잘 살았구나... 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