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들기란, 하나의 세상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

<The Fall(2006)>

by 가픽

수다

'영화를 찍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닌 영화'. <더 폴>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였다. 독서실에서 공부보단 딴짓에 열중했던 중학생 시절, 피키캐스트를 통해 이 영화를 접하게 됐다. 당시 나는 영화 자체보단 '영화 만들기'에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인셉션 메이킹필름, 영화제작 비하인드 기사 등을 찾아보는 거에 몰두했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듯이 긁어모았다. <더 폴>의 제작 비하인드 포스팅 역시 이런 맥락에서 클릭하게 됐다. 영화 제작을 위해 n년이 걸렸고 n개국을 돌아다닌 제작비화는 꽤 흥미로웠고, 함께 게시된 스틸컷도 인상적인 비주얼이었기에 머릿속에 오래 남게 됐다. 하지만 고약하게도 나는 10년이 넘는 지금까지 <더 폴>을 보지 않았다. 영화도 보지 않은 채, 그 영화의 비하인드에 대한 이야기만 간직했던 것이다. 배보다 배꼽, 주객의 전도 그 자체였다. 올겨울 재개봉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이런 알량한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리마스터링 및 재개봉을 해준 제작사, 수입사에 감사를 표한다.


TMI: 관련 기사를 찾아보던 중 CGV '단독개봉'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접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디트릭스 앱을 통해 CGV외 다른 극장에서도 예매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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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 이야기에서 시네마까지

<더 폴>이 영화에 관한 영화(메타 영화)라는 사실이 최초로 관객에게 드러나는 장면은, '알렉산드리아'가 좁은 열쇠 구멍을 통과한 빛이 벽에 상(狀)을 맺히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장면이다. 이 씬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문 너머 말(馬)의 모습이 거꾸로 뒤집혀 벽에 상영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영화사에서 말(馬) 이미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 촬영 기법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사진('The horse in motion')에 바로 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이 이미지와 관련된 내용을 재밌게 꾸민 이야기가 조던 필 감독의 <놉(2022)>에 담겨있다.) 대놓고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선언한 <더 폴>은 이후, '상상의 이야기 만들기' 과정을 담으며 이야기가 차곡차곡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는 주변에서 만나는 인물과 사건, 사물 그리고 각자의 개인사를 이야기에 녹여내며 둘만의 영화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다분히 구전 이야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선사시대의 이야기 혹은 민담은 지금까지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화자의 취향이나 생각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격이 변화(나쁜 신부가 착한 신부가 되거나, '블랙 밴디트'의 국적과 말투가 바뀌는 것처럼)했다. 이런 구전은 누군가 홀로 만들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입으로 계승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더 폴>의 감독은 이런 구전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거의 동일하다고 믿는다. 영화 역시 복수의 창작자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넣으며 캐릭터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는 구전에 더해 '시각'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었기에 뒤집힌 말그림을 가장 먼저 등장시킨 것이다.


▶ '진짜' 이미지는 힘이 세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의 얼굴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지닌다. 캐스팅 역시 감독의 능력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표정과 대사 하나하나가 꾸며낸 것이 아닌 진짜 무언가라는 느낌이 절절하게 스크린 너머로 전해온다. 이와 함께 <더 폴> 속의 미장셴 하나하나가 진정하고 진실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고민한 흔적이 진득하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CGI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글로 묘사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오직 시각적으로 <더 폴>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카메라 워크나 CGI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풀 샷 하나가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시네마천국>, <바빌론>, <더 폴> Let's go

2025년에 <더 폴>을 처음 본 관객들(그리고 중에 영화를 사랑하고 많이 찾아보는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특히 엔딩을 보며), 자연스레 <시네마천국(1988)>과 <바빌론(2023)>을 떠올렸을 것이다. 영화를 예찬하는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한 명의 시네필로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더 폴>은 특히, 추락해버린 영화인(스턴트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바빌론>을 닮아있다. 인상적인 것은, 두 영화 모두 영화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안을 다시 영화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바빌론>의 엔딩시퀀스에서 주인공 '매니'는 극장에서 영화의 발전사를 담은 몽타주를 보며 잃어버린 영화인생을 구원받는다. <더 폴>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직접 영화(이야기)를 만들며 부정하던 삶을 긍정하게 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처럼 추락한 스턴트맨을 위해 직접 목소리를 내어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며 사라져간 스턴트맨 한 명 한 명을 직접 구원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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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

따뜻하면서도 시각적으로 훌륭한 <더 폴>을 극장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내려가기 전 다시 보러 가지 싶다. 결혼식 시퀀스의 아름다움이 자꾸 머릿 속을 맴돈다.

2024년 개봉한 라이언 고슬링 주연의 영화 <스턴트맨>의 원제가 'The Fall Guy'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데미언 셔젤이 만든 단편영화 '스턴트더블(The Stunt Double, 2020)'도 스턴트맨에 대한 리스펙이 담겨있으니 관심 있으면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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