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때하자 Nov 25. 2021

사무관은 대체 무슨 일을 할까?

늦어지는 연재에 대한 조금 긴 변명

  아흔이 되신 우리 할아버지께선 나의 고시 합격을 가문의 영광이라며 기뻐하셨다. 그러면서 사무관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벼슬 관(官)' 자에는 '마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의 관청급 권한을 가졌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니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무관이라는 직위명에 대한 할아버지의 해석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수십 년 전에는 행시에 붙고 나면 지방 군수로 일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니 마냥 낭설로 치부할 일도 아닌 듯하다.


  대관절 명칭의 유래가 무엇이고 지위가 어떻든 간에, 청춘을 바쳐 공부를 하고 합격 후에는 공무원으로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텐데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고시판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무관은 대체 무슨 일을 할까?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주변에 물어봐도, 심지어 고시에 합격한 선배에게 물어도 속 시원한 답을 얻기 힘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무관의 업무가 너무 다양하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아서 그 누구도 감히 설명할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나도 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부처마다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사무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든 경우를 이야기해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해본 업무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수험생들의 궁금증 해소에는 적잖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잡담하는 마음으로 중앙부처의 사무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해보겠다.



  사무관의 업무를 소개하기 전에, 중앙부처 사무관의 90% 가까이는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린다. 서울살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큰 핸디캡임을 (특히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고향이 서울인 사람들은) 명심하자. (제발)


정부세종청사, 1동부터 15동까지 와룡 형상으로 디자인 되었다 (출처 : 중부메일)


1. 정책기획


  내가 고시 진입 여부를 고민하던 당시 누군가 사무관 업무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사무관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정책을
최초로 기획하는 사람이다.


당시에는 약간의 허세와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이 한 문장만큼 사무관을 잘 정의하는 말도 없는 것 같다. 매년 봄, 이듬해 예산을 편성하는 시즌이 되면 사무관은 자신의 소관 분야에 관한 새로운 정책을 기획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책의 개요와 필요 예산, 세부 내용, 기대효과 등을 보고서 형태로 정리하여 국과장님, 기재부, 국회를 차례로 설득시켜 차년도 신규 사업으로 실현시키는 업무다. 소관 분야에 대한 통찰력과 관심, 창의력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되는, 의미가 큰 만큼 꽤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보며 "왜 이런 정책이 없지?"라고 불만을 토로함에 그치는 데 비해 사무관은 이를 실제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사무관의 수많은 업무 중 가장 핵심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만든 정책이 수년에 걸쳐 발전해나가면서 특정 분야를 진흥하거나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수밖에.

  새로운 정책을 발굴하는 것 외에도, 기존 정책을 개선해나가는 것 또한 정책기획에 포함된다. 내 소관분야의 여러 정책을 보며 문제점을 찾고 이를 개선해나가는 역할이다.  


2. 예결산 관리


  정책기획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내가 담당하는 정책들의 올해 예산이 계획대로 잘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내년 예산의 필요한 부분은 증액하고 필요 없는 부분은 감액(니스카넨의 예산극대화 모형에서 예견(?)했듯이, 감액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예산/결산 실무는 대부분 주무관님들께서 도와주시지만 큰 틀에서 예산을 얼마 더 확보할지, 그리고 확보된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사무관의 소관사항이다.


3. 법률 제개정


  입법은 기본적으로 국회의 소관 영역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 해당 분야의 담당 사무관이 초안을 짜서 국회와의 의견 조율 후 발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실질적인 입법절차에서도 사무관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법 조문을 직접 작성한다니, 한 줄의 법 조항 만으로도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고, 삶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무게감 있는 일이다.

  또한 소관 분야에 이미 관련 법률이 존재하는 경우 해당 법률의 담당자로서 (법률정보센터에서 어느 법이든 검색해보자. 잘 보면 우측에 소관과가 명시되어있다) 국회에서 법 개정안을 발의할 때마다 이에 대한 검토의견을 작성하여 개정 필요성 및 조문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하는 역할을 맡는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물론 의원실에서도 담당 사무관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라, 담당 사무관이 개정안에 대해 수용 곤란하다는 입장을 냈을 때 개정안이 통과되는 경우는 드물다. (국회의 입법권한을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일환으로 이해하면 쉽다)


4. 축사 작성


  소관 분야에 행사, 시상식 등이 있다면 행사에 참석하시는 장관님이나 차관님의 축사를 작성해드려야 한다. 축사를 얼마나 멋지게 써드리느냐에 따라 현장에서 장차관님이 빛날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입장에 빙의해서 쓰는 것이 핵심이다. 가끔 내가 써드린 축사를 큰 행사장에서 장관님이 읽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무대 뒤에서 노래만 불러주는 김아중이 관객의 호응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서글퍼하는 것처럼)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쓴 글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못내 서운하기도 하다.


5. 보도자료 작성


  알리고 싶은 정책이나 행사가 있을 때 언론사에서 기사를 작성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보도자료를 작성한다. 아무래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개조식 문장(명사형으로 끝맺음하는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고 되도록 친절하게 일상용어를 활용하여 작성한다.

  보도자료의 내용은 대체로 복붙 형태로 기사화되기 때문에 보도자료를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정책 홍보효과가 좌우될 수 있다.  

  

6. 각종 간담회, 회의 주재


  관계 기관이나, 민원인, 관련 협단체 등을 상대로 소관분야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론 토론도 해야 하고, 입장이 다른 양측을 불러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행정학에서 흔히 배우는 위원회, 상생협의체 등을 만들면 실제로 사무관이 운영방안을 구상하고 실무 협의에 참여해야 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조리 있게 하는 능력도 생각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3차 면접이 있는 것이다)


7. 현장방문 및 소통


  소관 분야의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정책 현장에 방문하여 집행 상황을 지켜보고 현장의 목소리도 듣고 개선점을 발굴해야 한다. 윗 분들을 모시고 갈 때도 있지만 혼자 가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선배들은 현장에 많이 다녀야 좋은 정책을 펼 수 있다고 여기저기 다녀볼 것을 많이 권장하셨다.


8. 각종 민원 대응, 언론 대응


  전화로 소관분야와 관련된 정책, 사업 등에 대한 문의가 적잖이 들어온다. 일반 국민도 있지만 기자인 경우도 많아서, 묻는 내용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전화뿐 아니라 국민신문고를 통해서도 민원이 접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외에도 사무관의 업무는 무척 다양해서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업무가 무엇이든 주무관님들의 서포트를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주무관님들 도움없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무관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주무관님을 짝꿍처럼 생각해서, 짝주무관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주어지는 시간이 매우 짧다는 사실이다. 간혹 아주 민감한 문제에 대해 불과 몇 분 이내에 (정말 5분도 안 준다) 판단해서 답변자료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신규 사업(새로운 정책이나 제도)을 하루 이내에 고안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후 5시에 연락 와서는 다음날 오전까지 제출하라는 식이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연구결과 자료를 30분 내에 스캐닝하고 보완사항을 지적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난 오늘도 지방 출장 갈 일이 있어 오전 11시 열차를 끊어두었는데, 열차 타려고 사무실을 막 나서던 차에 소관 분야에 대한 답변자료를 당장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사무실에 앉아 (오분만에.. 누가 죽는 것도 아닌데 윗분들은 왜 이리 급하게 재촉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급히 자료를 작성하고 이제야 한숨 돌리는 중이다.


  간혹 PSAT의 의의와 필요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 업무는 PSAT보다 훨씬 급박하고 복잡하게 돌아간다. PSAT은 실무 현장을 아주 단순화시킨 축소판이므로 이 시험의 존재 의의에 더 이상 의문을 갖지 말자.

  왜 이런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지 의문과 반감이 든다면, 분명 업무를 할 때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더 큰 반감이 들 것이므로 지금이라도 다른 진로를 알아보자. (난 피셋에 딱히 불만이 없음에도 실무를 할 때에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ㅎㅎ.....)


 이상으로 잡담은 마치고, 다음 글에서 자료해석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자. 나도 다음 열차를 타기 위해 오송역으로 이동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